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예쁘장한 여자가 다가오더니 핸드백에서 립스틱을 꺼내 입술에 바른다.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한다. 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기절초풍할텐데 태연스럽게 그렇게 하고 있다.
나는 카페 안의 유리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것이 매직 유리(혹은 매직 거울)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이쪽에서는 저쪽이 유리처럼 투명하게 보이는 반면 저쪽에선 거울로서 작용할뿐 이쪽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 즉 한쪽에선 유리이며 반대쪽에선 거울. 거울 쪽에서 그녀는 내가 바라보는지 전혀 알 수 없는체 립스틱을 칠하곤 사라졌다.
만약 그녀가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면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당황도 할테고 쑥스럽게 여기거나 불쾌하게 여겼을 것이다. 성희롱으로 옭아매는 여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매직 유리는 관음증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딱 좋은 물건일 것이다. 몰카를 찍는 심리나 몰카 영상을 보는 사람들에도 이런 심리 기제가 숨어 있다. 이야기의 물꼬가 어쩌다 이리로 트였는데 말하고 싶은 것은 실은 끔찍한 것이다. 인간의 내면과 인간 관계에 관한 것이다.
매직 유리를 알게 된 후로 나는 저것이 사람의 내면과 무섭도록 닮아 있다는 생각에 전율할 때가 많았다. 편의상 A가 있다고 치자. A와 서로 친하고 내가 곤경에 처해 어렵사리 문을 두드렸을 때 그가 마음 문을 냉혹하게 닫는 순간 저것이 떠올랐다.
나는 A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여겼는데 실은 전혀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것이었다. 즉 A와 나 사이에 매직 유리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A는 그 안쪽에 숨어 있다. 거기서 나를 본다.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다. 그러나 내겐 A의 마음 속의 어떤 지점 너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처럼 A와 나 사이에 설치된 매직 유리, 그것은 언제부터일까. A에게서 똑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거듭 당한 나는 그런 생각에 빠져들게 되었고 그 설치는 원래부터 되어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A는 그 문은 항상 닫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열리지 않는 문이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그 부분은 A의 삶의 철학이나 세계관이 맞닿은 지점일 수도 있고 A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금기이거나 타고난 성격이나 기질, 습관,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A가 내게 공감을 자아낸다면 나는 닫힌 문이지만 열린 문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건 대개 희망사항일뿐 인간 관계에서 드물다. 대부분은 이기심 같은 본능으로 자물쇠를 걸어잠근채 모르쇠로 일관한다.
위기의 극한에서 친구들의 변별된다고 하는데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때에야 가능태로 드러나는 거지 실은 처음부터 잠재태로 있는 거라고. 단지 그와 나 사이에 원래 있는 매직 유리를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이런 격언들도 이에 비추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쌍방향적이기에 반대로 볼 수도 있다. 즉 A와 나 사이에 매직 유리가 거꾸로 놓인 상태, 다시 말해 A는 나를 전혀 볼 수 없고 나는 A를 환히 볼 수 있는 상태를 상정할 수 있다.
금전 문제를 가지고 예를 들었으니 가령 내면 세계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 보자. 나는 A가 나에 대해 꽤 아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가 나에 대해 전혀 달리 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금전 문제가 개입되어서는 아니었다. 물론 친구이기에 A는 나에 대해 꽤 잘 알고 때론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서도 깊게 알기도 한다. 그러나 내 내면의 어느 부분 특히 나로선 정체성 같은 것에 대해 전혀 모를뿐더러 알 생각조차 없다는 것을 느낄 때는 경악스러웠다.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살고 있는데 친구랍시고 거의 평생을 함께 했음에도 관심조차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거꾸로 알고 있는 것이다 (A와 나 사이의 관계를 입장을 완전히 바꾸더라도 마찬가지 결론에 도달한다고 간주하자.)
매직 유리의 이러한 점을 인간의 내면이나 인간 사이의 관계까지 확장시키는 것이 개연성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필자의 주관적 경험에서 나온 허구에 가까운 것일까? 사람마다 살아온 경험이나 환경에 따라 견해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심한 경제 침체나 실연 같은 상처, 전쟁 등등의 극단의 체험을 했거나 인생을 오래 산 사람들은 필자의 견해에 상당히 고개를 끄덕거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주관보다는 보편에 가까운 말이다. 인간의 마음은 하필 왜 그렇게 비극적인 구조로 되어 있을까.
지구에 사람들의 숫자가 A와 나(=B)뿐 아니라 편의상 A부터 Z까지 있다고 간주해보자. 매직 유리. 그런 공학적인 물건으로 인간이라는 복잡하고 심오하고 무궁무진한 존재를 비유하는 것은 결례이며 언어도단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단면을 예리하게 드러내는 것은 사실인 바 그것을 지구촌의 모든 인간 관계들 사이에 공통 원리의 하나로 삼아도 우리가 경험적으로 느끼는 세상의 풍경과 그리 다르진 않을 듯하다. 물론 인간이나 인류 사회는 보다 복잡하기에 매직 유리 아닌 또다른 매개체를 통해 본다면 또다른 풍경들이 나올 것이다. 그런 것들은 또 색다를텐데 매직 유리를 통한 세상의 풍경이 지배적일 수 있기에 비극성은 여전히 남는다.
A부터 Z까지의 모든 조합들이 매직 유리의 모습으로 환원되는 것이 인류의 극단의 모습일 것이다. 이해나 소통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 속으로 깊게 들어가면 이런 비극적 구조가 발견되기도 한다. 상처는 그 경우에도 발생한다. 이런 비극적 구조가 절대적이라고 느껴지게 되면 절망적 세계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조금씩 성격이 다른 풍경들이 선보일 것이다. 그 엄청난 스펙트럼의 두께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는 단절되고 소통이 안되는 것이 지배적이긴 하지만 그 자체를 뒤흔들며 찬란한 빛을 상대방의 내부로 몰고 오는 경우도 발생한다. 매직 유리를 깨면서 어둠 속에 숨은 타인을 꺼내주고 자신이 희생하는 경우도 있다. 매직 유리를 안쓰럽게 흔들다가 삶이 마감되는 경우, 그 안쪽에 사람들을 집단으로 몰아 넣고 독가스를 퍼붓거나 총알을 갈기는 경우, 식량을 제공하지 않아 굶어 죽이거나 병들어 죽게 하는 경우 등등 온갖 일들이 지구상에 펼쳐진다.
또한 역으로 매직 유리 아니고는 인간의 탄생이나 존재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매직 유리적 특성 자체가 존재의 기반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역설이지만 인간의 신비와 경이는 대개 여기서 비롯된다. 서로가 서로를 보지 못하는 참담한 비극으로 인해 문학이 발전하고 예술이 상승한다. 상상력도 날개를 단다. 과학은 상상력이 필수인 바 과학 발전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삶도 사랑도 대부분 이 차원에서 극한 갈등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빚어진다.
그러기에 매직 유리는 비극인 동시에 희극이고 절망인 동시에 희망이다. 아니 그 이전에 삶의 비결이자 비밀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인정하며 무조건 받아들이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러자면 답답해지기에 인간은 또 매직 유리를 흔들어 버리는 몸부림을 친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없앨 수도 그것만으로 살 수도 없는 것이 매직 유리이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 작동되는 모종의 룰이다. 당연히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작동된다.
매직 유리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것에 반투명 유리라는 것이 있다. 전자가 마치 평행우주론에서 말하는 평행 우주처럼 상대방의 세계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후자는 모호하게 보인다. 상대방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인지 위에 놓여 있다. 또한 전자가 상대방으로의 변환이 불가능한 반면 후자는 가능하다. 유리면이 거울이 되고 거울면이 유리가 되는 것이다. 제작 방식의 차이 때문인데 전자가 보통의 거울에 붙이는 금속보다 얇게 붙이는 반면 후자는 유리에 금속을 일정량 섞어서 만든다. 금속이 빛을 반사하는 성질을 지니기에 한쪽은 유리, 반대쪽은 거울이 되는 것이며 빛의 양에 따라 그 양면이 서로 뒤바뀌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유리 모두 반대쪽과 연결되어 있다는 면에선 동일하지만 이렇듯 차이가 있기에 앞에서 언급한 또다른 매개체로서 반투명 유리를 상정하면 인간의 내면이나 인간 사이의 관계는 또다른 풍경을 띠며 더욱 풍성해진다. 역지사지가 가능함으로써 소통 부재나 단절이 희망의 빛으로 바뀌기도 한다. 반투명성이 지닌 안개나 저녁 노을, 멜랑꼴리 같은 다채로운 이미지들의 향연도 펼쳐질 것이다. 인간은 그 어느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이 두가지 특수 유리가 어우러져 빚는 복잡다단한 풍경 이상일 것이다.
그 모든 풍경들의 어우러짐을 마술적 요지경이라고 부른다면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다. 이 두가지 유리와 그 외의 별의별 매개체들의 특징들을 두루 지니고도 남는 인간의 내면들 간의 마주침으로 인해 삶은 요지경이 되는데 그것은 마술적이기도 하고 광적이기도 하고 폭력적이기도 하고 악마적이기도 하다. 마술적이란 말은 그 전체를 아우르는 형용사로 이 글에선 쓴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