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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티션스토리] (상) 판사에서 여당 대표까지…'미스터 스마일' 황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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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와보니 실망도…아내 말 듣고 크게 반성"
"옛 정치, 여야 구분 없이 동료애·끈끈함 있었다"

[서울=뉴스핌] 신정인 기자 = "가난하지만 열기 있고 나라사랑을 강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참 그리운 그 시절이 제 인생의 밑바탕이죠."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출신 황우여 상임고문은 20일 유튜브 채널 뉴스핌TV '폴리티션스토리'에 출연해 어린 시절부터 판사, 그리고 집권여당의 대표가 되기까지의 삶을 돌아봤다. 해당 방송은 지난달 30일 촬영됐다.

황 상임고문은 20년 넘게 판사로 재직하며 MBC 언론통폐합 결정을 뒤집는 'MBC 주식 반환' 판결, 국내 1호 재산분할 판결, 국민저항권을 인정한 명동 사건 등 굵직한 재판을 담당했다.

정계 입문은 이회창 당시 대법관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황 상임고문은 "정치 가문인 아내는 결정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자녀들은 절연하듯 반대했다"며 당시의 복잡한 심정을 털어놨다. 그는 정치 초기에 실망과 우려도 컸지만 아내의 조언을 듣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새누리당 대표 시절에는 대선을 앞두고 당대표실을 광주로 옮기는 등 57일간 호남 곳곳에서 집중 유세를 펼쳤다. 그는 "당시 우리 당이 최초로 호남에서 두자릿수의 지지율을 기록했고, 그것이 대선 승리의 큰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황우여 국민의힘 상임고문. [사진=뉴스핌TV]

1947년 인천에서 태어난 황 상임고문은 송림초·인천중·제물포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와 동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69년 제10회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는 서울지법·서울고법 판사를 비롯해 춘천·제주지법 수석부장판사로 재직했다. 이후 헌법재판소 헌법연구부장, 인천지법 부장판사,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 등을 역임한 뒤 차관급인 감사원 감사위원을 끝으로 법관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어 황 상임고문은 1996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원회 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5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뒤 16대부터 19대 총선까지 인천 연수구에서 내리 당선되며 5선 의원을 지냈다.

18대 국회에서는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선출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과 국회 선진화법안 등을 통과를 주도했다. 19대 국회에서는 첫 새누리당 대표를 맡았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올해는 21대 대선 경선과 당 전당대회에서 각각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았다. 현재는 황앤씨로펌 대표변호사이자 당 상임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다음은 황 상임고문과의 폴리티션스토리 인터뷰 내용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뉴스핌TV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신정인 기자, 이하 신 기자)
정치인의 인생 궤적을 돌아보는 폴리티션스토리 시작합니다. 오늘은 5선 당대표 출신 황우여 국민의힘 상임 고문님 모시고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고문님, 안녕하세요. 요즘 날이 많이 쌀쌀해졌는데 어떻게 지내셨어요?

▲(황우여 상임고문, 이하 황 상임고문)
그동안 밀려있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잠깐 외국에도 갔다 오고요. 동지들이 고생하면 제가 변호사니까 찾아뵙기도 하고 그러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신 기자)
정치 후배님들도 많이 만나시나요?

▲(황 상임고문)
네, 연락 오면 제가 만나러 가고요.

-(신 기자)
네, 고문님 그럼 이제 어린 시절 이야기 좀 여쭤볼게요. 1947년 인천 송림동에서 자라셨는데 당시 어떤 꿈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황 상임고문)
송림동이 인천에서 아주 어려운 동네예요. 인천이 그때는 아주 조그마한 도시였는데 수도국산 뭐 이러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 있기 때문에 한 반이 대개 한 80명으로 12반까지 있어서 한 학년이 거의 1000명 가까이 되고. 한 학교는 5000~6000명 되는 그런 학교를 어렸을 때 다녔죠. 친구들하고 잘 지냈고 가난했지만 안전하고 화목하고 뭔가 열기가 있는 그러한 생활, 그때 당시는 나라 사랑을 굉장히 강조했어요.

예를 들면 국산품 쓰자고 하고, 교장 선생님도 말씀하실 때는 웅변조로 얘기를 하시고 굉장히 독립투사 같은 그런 분위기가 지배하고 또 이제 6.25 전반에 다니는 학교이기 때문에 천막에서 공부했는데 그래도 참 그리운 시절이었죠.

-(신 기자)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서울대 법대 전공하시고 28살이라는 사실 되게 어린 나이에 판사 생활을 시작하셨잖아요. 어린 시절부터 꿈이 판사셨는지.

▲(황 상임고문)
고시 붙기는 69년도 대학교 졸업하면서 합격을 해서 군대 갔다 오니까 사법대학원 2년에 군대 갔다 오니까 5년. 그렇죠. 만으로는 한 스물일곱 정도에서 판사 시절을 시작했는데 인천이 법조 분위기가 아니에요. 고시 보고 그러는 것보다는 장사하고 특히 이공계가 강하고 그런 도시 분위기였는데 저도 그때 법대가 뭔지 모르고 갔는데 그 계기가 맨 처음에는 이제 농대 가려고요. 이공계에 가서 공부하다가 우리 교장 선생님이 '땀을 흘리는 것이 최고다'라고 해서 '유한흥국(流汗興國) 땀을 흘려야 나라가 흥한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땀 제일 많이 나는 학과가 농과다 그래서 제가 농과를 가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집에 농토가 없잖아요. 그때 역사 토인비 신드롬이 있어서 역사학자가 되려고 문과로 바꿨는데 아버님은 자꾸 상대를 가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이제 은행이 취업이 제일 좋은 때니까. 그러다 보니 혼란이 생겼고, 특별히 마음도 안 정해지고. 또 특별히 잘하는 일도 없는 사람은 법대가 좋다라는 유진호 선생님의 수필을 하나 읽었어요. 그래서 법대를 가게 된 거예요. 고시가 있는지도 모르고 갔는데 제가 산 타는 걸 좋아해서 암벽 등반에 아주 매료 당해갖고 대학교 3학년 넘어까지 그러고 나니까 영장이 나오는 거예요.

급한 마음에 '아 그러면 나도 변호사 시험을 하나 따놓고 취업 걱정에서 벗어나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그때부터 고시를 봐서 다행히 이제 졸업할 때 합격을 해서 이제 영장 기피는 안 했죠. 제가 만약에 그때 고시가 안 됐으면 저는 군대 갔다 와서 방향을 다른 걸로 바꾸려고 마음을 먹고 했는데 다행히 변호사 자격을 땄죠.

-(신 기자)
그러면 판사로는 총 몇 년을 재직하셨나요?

▲(황 상임고문)
한 20년 넘게 했죠. 부장 판사까지 했으니까요.

-(신 기자)
돌아보셨을 때 기억에 남는 일화나 이런 게 있으셨을까요?

▲(황 상임고문)
큰 재판을 많이 했는데 기억에 남는 거는 민사부장 할 때에는 MBC가 언론 통폐합을 해서 다 이렇게 묶였어요. 근데 그걸 '강압에 의해서 한 것이다'라고 해서 취소하는 소송이 들어왔어요. 제가 보니까 '이거는 좀 우리 민사법상 문제가 있다. 취소해라 다시 정당하게 수용을 하든가 뭐 다른 계약을 해라' 이런 판결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MBC 사건이 그때 사회 이슈가 됐었고.

그리고 제가 가정법원에 있을 때는 재산 분할을 처음 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최초의 1호 사건이었어요. 그때 법이 바뀌어갖고 이혼할 때 위자료가 아니라 재산을 나눠가지라고 하는 게 법이었는데, 저는 남자 대학생과 여자 대학생이 결혼해 가지고 가정은 여자 대학생이, 부인이 책임지고 또 외부에서 여러 재정적으로 충당하는 건 남자가 했다고 하면 두 사람 사이에 그 재산은 공동으로 모은 것으로 합의가 된 것이라고 생각해서 (재산을) 반반씩 하라고 판결을 했어요.

그런데 이제 뒷말이 많았죠. 국제적으로는 대개 여자한테 3분의 1 주라 그러는 게 기준이었나 본데 우리는 양성평등 아니에요. 그리고 또 부부가 그렇지 않고는 누가 가정을 지키겠어요? 그때만 해도 대부분 주부들이 가정을 지키고 아기 기르고 그런 데 전념하던 시절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 판결이 기억에 남고.

여러 사건들이 있지만 형사재판에서는 제가 국민 저항권에 대한 판단을 내린 판결이 있었어요. 명동 사건이라고 굉장히 큰 사건인데 성직자도 있고 그래서 제가 사실은 피하려다 목사님들이나 여러분들 얘기가 그냥 맡겨줬으면 하는 게 옳다 그래서 했죠.

그때 전상석 부장께서 이제 재판정이셨는데 (저항권 문제를) 한번 연구해서 써보라고 해서 제가 각종 문안을 섭렵하고 저항권 부분을 정리했죠. 그 판결이 우리나라의 최초의 국민 저항권에 대한 판결이었죠. 대법원에서도 그 부분은 받아들여지고 그랬어요.

-(신 기자)
판사로서 상당히 성공적으로 잘 하시고, 오래 하셔서 애정이 많이 생기셨을 것 같은데 정계로 넘어오셨을 때 고문님 스스로나 아니면 가족분들 우려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황 상임고문)
원래는 교수 하라고 우리 선생님이 교수 수업을 시켰는데 판사 한 다음에는 그걸 천직으로 생각하고 판사에 충실하려고 했죠. 그런데 당시 우연치 않게 MBC 판결 같은 것이 뒷말이 있었어요. 당시 이회창 대법관께서 감사원장을 가시면서 저보고 같이 좀 가자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때 아주 훌륭한 법관이셨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덕망이 높은 분이거든요.

제가 기도하고 나서는 그냥 모시고 가야겠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했고 감사원까지 가는 것은 괜찮았는데 감사원에서도 여러 이야기가 겹치면서 결국은 이회창 감사원장이 정계에 들어오면서 또 저보고 가자고 그러셔서 그때는 좀 어떡할까 하고 고민했죠. 감사원까지만 해도 사법부지만 정계는 우리 사법관들로서는 경계를 넘어서는 거거든요.

제가 같이 하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우리 아내가 정치인 집안의 딸내미예요. 그래서 아내는 아버지 하는 걸 보면서 그렇게 결정이 된다면 자기는 따르겠다고 그랬는데 우리 애들은 아버지하고 딱 절연을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정치한다는 말을 입 밖에도 안 내놓고 그래서 큰딸이 결혼할 때 아무도 몰랐어요. 교회에서 조그맣게 모여서 결혼했는데 큰딸의 가장 친한 친구가 한겨레 신문사 기자였어요. 걔가 와보더니 '저 사람이 네 아버지냐' 그래가지고는 요만한 기사를 사후에 냈어요. 그래서 알려지게 됐죠. 그런데 애들이 아버지가 정치인이면은 어떤 그런 데 휩쓸릴까 봐 저도 애들은 자기 세계를 지킬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썼죠.

-(신 기자)
자녀분들은 반대가 좀 있었더라도 사모님은 이제 정치 생활 하실 때 고민 상담이나 조언 같은 것도 많이 하셨겠어요.

▲(황 상임고문)
정치권에 들어와 보니 주변에 판사나 이런 고위 관료로서 대하던 사람들하고 다른 거예요.
그래 갖고 어떤 때 실망도 되고 너무 걱정도 되고요. 집에 와서 나도 모르게 좀 훌륭한 사람들하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이런 얘기를 불만스럽게 했나 봐요.
그랬더니 우리 집사람이 성경에 다윗 임금을 따라다니던 한 300명가량, 요샛말로 하면은 불한당이나 정말 오갈 데 없는 사람 그런 사람들 얘기를 하면서 '다윗 임금은 그런 사람들하고 나중에 훌륭한 임금이 되는데 내가 볼 때는 당신 주변의 사람들 아주 훌륭하더라' 이러더라고요.

그때 크게 반성했죠. 이게 내 문제구나 하고. 그래서 주변 분들을 평하고 그러는 거를 제가 딱 금하고 '그래, 맞아. 다윗 임금과 같이 했던 사람들보다는 100배 훌륭하지 않나' 그런 생각으로 이제 마음을 바꿨고요.

우리 사모님들이 정치인들한테 큰 영향을 미쳐요. 고생하는 것도 우리가 좀 알아드리고 그래서 남편의 일에 그냥 따른다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서 잘 좀 대우를 해 드렸으면 하는 게 제 생각이고.

애들은 반대한다기보다도 그걸 이제 절연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아버지고 우리는 우리다' 그러는데 우리 애들이 그게 좀 강해가지고요. 그런데 선거 때는 아주 열심히 도와주죠.

-(신 기자)
정치 첫 시작을 신한국당에서 하셨잖아요. 그때와 지금의 분위기는 많이 다를 것 같은데 당시에 어떠셨는지도 궁금합니다.

▲(황 상임고문)
지금은 완전히 자유롭고 선수나 이런 것이 별 의미가 없는 정치 분위기인데 옛날에는 선배들에 대한 것이 아주 엄했어요. 선수에 따라서 아주 딱 정해져 있고 그건 벌써 옛날 얘기죠. 그때는 선배들한테 배우려고 그러고 초선에는 뭘 하고 재선에는 뭘 하고 이게 다 정해져 있었어요.

그래서 그대로만 이렇게 잘 진행하면은 배울 수 있고 또 동료들도 형성이 되고 그러는 분위기고. 그때는 국회의원을 '선량'이라고 그래서 상당히 존경하는 분위기고 지도력이 부여되는 그런 시기였는데 벌써 옛날 얘기죠.

-(신 기자)
정치하시면서 어려우실 때 도움이나 조언을 받았던 정치인 분들도 있을까요?

▲(황 상임고문)
그때 당시에는 저희가 우리 당내뿐만 아니라 여야가 참 친했어요. 아주 친해서 어려운 일이거나 뭐 이렇게 의논하고 서로 의지했던 게 김영진이라고요. 해남 완도 출신 국회의원인데 나보다 선수는 한 해 빠르셨고 나중에 농림부 장관도 지내시고 그런 분인데 같은 이제 교회 장로로서 형제 같은 우애를 나누면서 우리 당과 민주당의 당론에 좀 어긋나더라도 누가 뭘 하겠다 그럴 때는 서로 도왔어요. 입장을 같이 하고 그래서 당내를 설득하면서 그때 그렇게 했습니다.

-(신 기자)
당시가 조금 더 끈끈했던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황 상임고문)
여야를 넘어서도 뜻이 맞고 올바른 일이라고 하면 마음을 합치는 의원들이 형성이 되고 그랬어요.

-(신 기자)
새누리당 대표도 역임하셨잖아요. 사실 새누리당 때도 내분이 굉장히 심하고 당이 많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혹시 그때 힘들면서도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시다면.

▲(황 상임고문)
새누리당 당대표를 할 때는 그때 대선을 치러야 되는 당 대표였거든요. 어려운 자리죠. 박근혜 후보가 대선 후보로 나서면서 당 대표의 최대 임무가 대선을 성공시키는 거였는데 제가 이렇게 생각하니까 핵심이 호남이 우리 당을 얼마나 인정해 주느냐일 것 같아요.

대선 기간 동안에 대표실을 광주로 옮겼어요. 그래서 광주에서 조그마한 호텔에서 머물면서 지냈죠. 57일 동안 호남을 샅샅이 다니면서 선거 유세하고 또 무슨 민원이 있으면 우리가 그때 여당이었으니까 원스톱으로 해결하고 최고위회의도 웬만하면 내려오라고 그래서 거기서 하고 이렇게 하면서 호남 분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을 했는데 그래서 그때 저희가 두 자릿수의 지지를 받았어요. 최초죠.

수도권에는 호남 분들이 많이 계시잖아요. 거기서 20% 이상의 지지가 나왔다라고 저는 보는 거죠. 그것이 대선 승리의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고 또 한편에서는 호남에 대한 애정이 생기더라고요.

호남이 아주 산천 경계가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음식이 맛있어요. 그래서 음식을 너무 좋아하게 됐고 또 호남 분들이 아주 정이 많고 의리를 중요시해요. 그래서 한 번 이렇게 인연을 맺으면 아주 절대적이에요. 지금도 그분들하고 교우를 하고 이렇게 지내는데 좋은 추억이 됐죠.

-(신 기자)
고문님께서 생각하시기에 호남 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으셨는지 궁금한데요.

▲(황 상임고문)
그분들이 원하는 것이 현지인의 중용이에요. 수도권에 와있는 호남 출신 분을 장관에 앉히고 또 무슨 귀한 일을 맡기고 그러는 것도 고맙지만 현장에 있는 분들 직접 불러야 호남인을 썼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호남에서 생활하는 호남인을 발탁해 줘야죠. 그렇지 않으면 서울에 와있는, 고향만 호남인 분들만 있다면 호남분들이 '우리도 다 서울 가야 되잖아요' 이렇게 느끼거든요. 그 말은 제가 아주 뼈아프게 받아들여서 그 후에 우리 당에게 제가 '지방을 우대한다고 할 땐 그 지방에 있는 분들을 모셔서 정무직이나 당직을 드리는 게 맞다'고 얘기하죠.

-(신 기자)
고문님 혹시 별명 뭔지 알고 계세요? '어당팔'이라고 '어수룩하지만 당수가 8단'이란 별명인데 혹시 그 별명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요.

▲(황 상임고문)
정치부 반장들이 지어준 이름이에요. 제가 당수는 모르겠지만 검도는 7단에요. 당수는 입문도 안 했는데 이제 (기자들이) 저 사람이 뭘 할까 하고 보면은 '그래도 열심히 해서 일을 해결해내는구나' 생각해서 칭찬 반 놀리는 것 반으로 지은 별명인 것 같습니다.

allpass@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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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대도 없네"…청계천 자율주행버스로 달린다 [서울=뉴스핌] 조수민 기자 = "버스가 스스로 달리는 것도 신기한데, 창밖으로 야경까지 볼 수 있네요."(서울시민 박모(53)씨) 지난 22일 저녁 청계광장 '청계 A01' 정류장. 은색 자율주행버스가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류장에 줄을 서 있던 시민들이 기대에 찬 얼굴로 하나둘씩 버스에 올라탔다. 운행 시작까지 20분가량 남은 시점에 이미 정원 8석이 모두 찼다. 길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신기한 눈빛으로 버스 사진을 찍었다. 버스 내부에는 운전석이 있어야 할 앞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운전대와 브레이크도 없었다. 그러나 버스는 일반 차량과 다름없이 도로 위를 달렸다. 옆차선에서 갑작스레 차가 끼어드는 상황에서도 사람이 운전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였다. [서울=뉴스핌] 조수민 기자 = 22일 서울 중구 청계광장 정류장에 '청계 A01'이 정차돼 있다. 2026.10.22 blue99@newspim.com 서울시는 이날부터 청계천 자율주행버스 '청계 A01'의 야간 운행에 돌입했다. 청계 A01은 '청계광장~청계3가(세운상가)~청계5가(광장시장)' 4.8km를 왕복으로 오간다. 지난해 9월 운행을 시작했다. 기존에는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50분까지 운영됐다. 앞으로는 주간 운행을 중단하고 첫차가 오후 7시, 막차가 밤 11시에 청계광장에서 출발한다. 해당 노선에는 차량 2대가 투입돼 순환 운행한다. 양방향 총 11개의 정류소에 정차한다. 청계광장 기준 30분 간격으로 하루 9회 운영한다. 운영은 오토노머스에이투지가 맡는다. 네이버지도와 카카오맵 등에서 '청계 A01'을 검색하면 정류소 위치와 실시간 운행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레벨4 수준의 자율주행버스를 야간 시간대에 정기 운행하는 것은 국내 최초다. 서울시는 청계천이 광화문·종로·을지로 일대의 관광명소와 상권이 이어지는 곳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퇴근 이후에도 산책, 식사, 관광 등을 즐기려는 시민과 관광객의 발길이 많아 심야 교통 확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청계 A01 노선 인근에는 광화문광장, 보신각 등 명소와 종각·관철동의 음식점 거리, 을지로 상권, 광장시장 등이 위치한다. 서울시는 이번 야간 운행이 청계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광명소와 상권을 하나의 교통축으로 연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서울=뉴스핌] 조수민 기자 = '청계 A01' 내부 좌석. 2026.10.22 blue99@newspim.com 이날 현장에서는 야간 시간대 운영을 환영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청계광장에서 버스에 올라 광장시장에서 하차한 김모(29)씨는 "직장인들은 밤에 버스를 운영해야 탈 수 있기 때문에 야간 운영 방식이 반갑다"며 "목적지까지 갈 수 있으면서도 자율주행버스를 체험해볼 수 있어서 좋다. 향후에도 또 탈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자율주행버스로 서울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집트에서 여행을 왔다는 30대 마리얌씨는 "지나가다가 우연히 자율주행버스가 운행 준비 중인 것을 보고 궁금해서 타봤는데 색다른 경험이라 좋다"며 "서울의 밤거리를 구경하면서 새로운 기술까지 경험할 수 있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앞서 서울시는 지난달 18일부터 31일까지 야간 시간대 시범운행을 실시했다. 해당 기간 452명이 버스에 탑승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청계천 일대는 밤 시간대 유동인구가 많아 자율주행버스 야간 운행 수요가 높을 것으로 예상했다"며 "실제 서울시민과 내국인·외국인 관광객 등 다양한 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청계 A01은 자율주행하다가 돌발상황이 발생하면 안전관리자가 조이스틱으로 수동운전한다. 서울시는 자율주행버스의 운행 시간대를 주간에서 야간으로 전환한 만큼 안전성 확보에 더욱 주력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난 8월 야간 시간대 시범운행을 실시하면서 외부 전문가와 함께 안전성을 미리 검증했다"고 강조했다. 서울시는 자율주행버스의 정규 대중교통수단 정착을 위해 단계적인 유료화를 추진한다. 서울 순환버스 요금(1400원) 수준을 고려 중이다. 우선 야간운행 초기에는 시민들이 부담 없이 체험할 수 있도록 무료로 운영한다. 요금은 부과되지 않지만 탑승 시 교통카드를 태그해야 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시는 밤을 체류와 소비의 시간으로 만드는 '야간경제 활성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며 "이번 청계 A01 야간 운행이 시민들의 야간 이동 편의를 높이고 지역 상권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blue99@newspim.com 2026-10-2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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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난 佛 시위가 한국에 던지는 경고는? [세종=뉴스핌] 김범주 기자 = 프랑스 주요 도시들이 대규모 시위에 이어 폭력사태로 혼란에 빠졌다. 열악한 교육 환경에 반발한 고등학생들의 시위에 생활비 상승과 공공서비스 축소, 불평등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이 가세하면서 사회적 혼란이 확산하고 있다. 여기에 정부의 긴축 기조에 대한 반발까지 겹쳤다. 그 배경에는 누적된 재정적자가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가 2027년 예산안에 약 540억 유로 규모의 지출 절감 방안을 담겠다고 밝힌 것이 '저항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가 없다면 내년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6.5% 안팎까지 불어날 것이라는 게 프랑스 정부의 추산이다. 한국 경제는 이와 전혀 다른 흐름을 보이고 있다.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월간 수출액은 사상 처음 1200억달러를 넘어섰고, 세수는 정부 예상보다 63조원 넘게 더 걷힐 전망이다. 하지만 연초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반도체 등 정보기술(IT) 부문을 제외한 성장률은 1%대에 그쳤다. 특정 산업의 호황에 기댄 세수 증가를 바탕으로 재정지출을 늘리는 것이 지속 가능한지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 17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생활비와 유가 상승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복면을 쓴 한 시위자가 불타는 자전거 앞을 지나가고 있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 실적 따라 출렁이는 법인세…의무지출은 계속 불어나 22일 관세청에 따르면 9월 수출 확정치는 1211억달러로 전년 동월 대비 83.7% 늘었다. 월간 기준 사상 최대 기록이다. 이 가운데 반도체 수출이 605억달러로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다. 반도체 호황에 나라 곳간도 두둑해졌다. 올해 국세수입은 추가경정예산 대비 63조2000억원 더 걷힐 것으로 전망된다. 내년 세입 전망은 더 낙관적이다. 2027년 국세수입 예산안은 584조4000억원으로 올해 본예산보다 194조2000억원 늘었다. 특히 법인세는 216조7000억원으로 올해 추경 기준보다 115조4000억원 많다. 문제는 법인세가 경기와 기업 실적에 민감한 세목이라는 점이다. 실제 법인세 수입은 2022년 103조6000억원에서 2023년 80조4000억원, 2024년 62조5000억원으로 2년 만에 41조1000억원 줄었다. 반도체를 비롯한 기업 실적 악화와 세제 변화 등이 맞물리며 대규모 세수 결손으로 이어졌다. 반도체 밖으로 눈을 돌리면 성장 동력도 뚜렷하지 않다. 한국은행이 올해 초 제시한 IT 부문 제외 성장률은 1.4%에 그쳤다. 반도체 기업들이 수출 기록을 갈아치우는 동안 청년 취업자는 47개월째 감소했다. 수출과 세수는 호황인데 일자리와 내수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양극화가 이어지고 있다. 세수는 경기 흐름에 따라 급변할 수 있지만, 한번 늘린 지출은 다시 줄이기 어렵다. 호황기에 늘어난 세입을 토대로 장기간 이어가야 하는 사업을 확대하면, 경기 하강기에 재정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장기 전망도 밝지 않다. 국회예산정책처의 '2025~2072년 장기재정전망'에 따르면 GDP 대비 의무지출 비율은 2025년 13.9%에서 2072년 21.6%로 오를 것으로 추계됐다. 의무지출에는 연금과 복지급여, 지방이전재원, 이자지출 등이 포함된다. 전체 정부 지출에서 의무지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같은 기간 54.4%에서 64.3%로 높아질 전망이다. 정부가 쓰는 돈 100원 가운데 64원 이상을 법률과 기존 제도에 따라 지출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뜻이다. 정부가 지난해 9월 발표한 장기재정전망에서도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2035년 71.5%에서 2055년 126.3%까지 오를 것으로 추계됐다. 현행 제도와 일정한 경제·인구 가정을 전제로 한 전망치지만, 장기적으로 국가채무 부담이 커질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한국과 프랑스의 국가채무비율은 통계 범위가 다르다. 한국의 장기전망은 국가채무(D1)를, 프랑스는 일반정부부채(D2)에 해당하는 범위를 쓴다. 숫자만 단순 비교해 한국의 재정 상황이 프랑스보다 나빠질 것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지난 17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시위 현장. [사진=로이터 뉴스핌] ◆ 위기 때 늘린 지출, 끝내 되돌리지 못한 프랑스 재정 측면에서 프랑스 위기를 들여다보면, 경기침체기에 늘린 지출을 이후 충분히 줄이지 못한 구조적 문제가 드러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6년 프랑스 경제보고서'에 따르면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프랑스와 유로존은 GDP 대비 기초재정지출을 비슷한 폭으로 늘렸다. 하지만 2019년까지 유로존이 증가분의 약 4분의 3을 되돌린 반면, 프랑스는 절반가량을 줄이는 데 그쳤다. 그 결과 2019년 프랑스의 GDP 대비 기초재정지출은 금융위기 이전보다 2.1%포인트(p) 높은 수준에 머물렀다. 여기에 고령화에 따른 사회보장 지출 증가와 코로나19·에너지 위기 대응 과정에서 불어난 재정 부담이 더해졌다. 올해 2분기 말 프랑스 정부부채는 3조5955억유로로 GDP의 119%에 달했다. 전 분기보다 1.5%p 높아진 수치다. 지출을 줄여야 할 필요성은 커졌지만 교육·복지·생활비 지원 등 공공서비스 확대 요구도 계속되고 있다. 긴축을 둘러싼 갈등이 쉽게 풀리기 어려운 배경이다. 장영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북미·유럽팀장은 "프랑스 사태는 공공서비스에 대한 불만, 생활비 부담, 사회적 불평등 등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며 "다만 장기간 누적된 재정적자가 정부의 대응 여력을 제약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제28회 반도체대전(SEDEX 2026)'이 열린 지난 14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삼성전자 부스를 찾은 관람객들이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인 HBM4E(7세대)를 관람하고 있다.[사진=뉴스핌DB] ◆ 반도체가 벌어준 '골든타임' 고령화는 한국에 더 큰 부담이 될 전망이다. OECD에 따르면 생산가능인구(20~64세) 100명당 65세 이상 인구는 2024년 한국이 29.3명으로 프랑스(40.2명)보다 적었다. 그러나 2054년에는 한국 84.5명, 프랑스 53.4명으로 역전된다. 국제통화기금(IMF)도 2025~2030년 한국의 GDP 대비 연금 지출이 0.7%p 늘어 프랑스(0.1%p)의 7배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고령화로 재정 여력이 빠르게 소진될 수 있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한국과 프랑스의 재정 여건과 사회·정치적 환경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한번 늘린 지출의 지속 가능성과 향후 구조조정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김학수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한번 늘린 지출을 앞으로 들어올 세수로 감당할 수 있느냐가 논의의 핵심"이라며 "정부가 구상 중인 미래대응기금이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일반회계에서 100조원 적자가 나는 상황에서 그만큼을 기금에 넣는 게 바람직한지는 정부의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학자는 "장기적인 재정위기로 가는 길을 택했다기보다는 새로 생긴 세원을 두고 사회적 논의를 시작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며 "되돌릴 수 없는 지출에 세수를 모두 쓰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한 정부 관계자는 "반도체가 한국 경제에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그 시간을 미래에 쓸 돈을 마련하는 데 쓸지, 미래에도 계속 돈을 써야 하는 구조를 만드는 데 쓸지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wideopen@newspim.com 2026-10-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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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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