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KYD 디데이
정치 국회·정당

속보

더보기

[KYD 폴리티션 스토리](상) 허은아 대표 "국민의힘에 있었다면 탄핵 찬성표 던졌을 것"

기사입력 : 2025년01월01일 08:00

최종수정 : 2025년01월07일 15:25

※ 본문 글자 크기 조정

  • 더 작게
  • 작게
  • 보통
  • 크게
  • 더 크게

※ 번역할 언어 선택

[서울=뉴스핌] 신정인 기자 = 허은아 개혁신당 대표는 지난달 31일 방송된 정치인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는 뉴스핌 '폴리티션 스토리'에서 "만약 제가 국민의힘에 아직 있었다면 저는 분명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찬성표를 던졌을 것 같다"고 밝혔다. 해당 방송은' 지난달 10일에 촬영됐다.

허 대표는 '뉴스핌 TV'를 통해 공개된 폴리티션 스토리에서 "그렇게 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고, 그게 안 될 것 같으니까 (국민의힘을) 탈당하고 개혁신당에 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딸이 '만약 엄마가 처음에 생각했던 그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정치를 그만 뒀으면 좋겠다'고 계속 얘기를 한다"며 "저는 딸에게 '그 약속은 지키겠다'고 얘기한다. 정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비겁하기 싫다"고 강조했다.

허은아 개혁신당 대표. [사진=뉴스핌 DB]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난 허 대표는 서울 문창초등학교, 대방여자중학교, 무학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인하공전 항공운항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 편입 학사 학위를 취득, 연세대학교에서 광고홍보 석사, 성균관대학교에서 대학원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항공 승무원으로 5년간 근무하던 허 대표는 이미지 컨설팅 회사인 '예라고'를 설립해 20여 년간 컨설팅 관련 방송·강연 활동을 이어갔다.

지난 2020년 1월에는 자유한국당 외부 인재로 영입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같은해 4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미래통합당의 비례대표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으로 옮겨 비례대표 19번으로 당선됐다.

이듬해 4월 재보궐선거에선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뉴미디어본부장을 역임했으며 2023년에는 국민의힘 제3차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 경선에 도전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그해 12월 국민의힘에서 탈당, 이준석 전 대표가 창당한 개혁신당에 합류했다. 2024년 5월에는 개혁신당 전당대회에서 득표율 38.4%로 당 대표에 당선됐다.


다음은 허 대표와의 폴리티션 스토리 인터뷰 전문이다. 

-(신정인 기자, 이하 신 기자) 대표님 근황부터 먼저 여쭐게요. 지금 개혁신당 당 대표로 지내신 지 벌써 7개월 가까이 됐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허은아 대표, 이하 허 대표) 원래 차근차근 저는 이제 목표를 향해서 우리 개혁신당의 구조를 만들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시계가 빨라졌어요. 정치 시계가. 그래서 내년에 있을 4월 2일 재보궐 선거를 저희가 준비하면서 재보궐을 중간고사로 생각하고 또 26년도에 지선을 기말고사로 생각하면서 27년도에 대선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지금 뭐 비상계엄이 실패로 돌아가고 난 뒤 지금 탄핵 지금 상황이 됐잖아요. 내부에서는 조금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고 대한민국의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에 대해서 상당히 안타깝게, 사실은 침몰하고 이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되냐라는 부분에 가장 큰 고민이 있고요.

어차피 새로운 리더는 탄생을 해야 되는 상황이 됐고 리더 탄생을 하게 됐을 때 늘 똑같은 실수와 실패가 없으려면은 기존을 좀 돌아보면서 어떤 것이 문제가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리더가 서야만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을지 이제 그런 부분도 고민하고 있고. 그런데 제가 이제 당대표이다 보니 당대표로서의 우리 당의 후보도 중요합니다만 또 대선을 치를 수 있는 기본적인 개혁신당만의 시스템도 구축을 해야 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이것저것 많이 좀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신 기자) 원래도 또 워낙 워커홀릭이신데 좀 이런 엄중한 시기라

▲(허 대표) 기자들한테 소문 났습니까

-(신 기자) 네 맞습니다. 또 이런 엄중한 시기라 더 어깨가 많이 무거우실 것 같으세요. 학창시절에도 혹시 좀 이런 정치인의 꿈을 가지고 계셨는지 아니면 다른 꿈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허 대표) 학창시절에는 전혀 정치인은 꿈을 꾸지는 않았었던 것 같아요. 저는 가르치는 일은 하고 싶다라는 생각도 했었고 공부를 좀 더 잘하면 뭐 아나운서 이런 것도 좋겠다 이런 생각도 했었는데 살아보다 보니까 제가 여승무원도 했고 그리고 그걸 통해서 또 학교 강의도 하게 돼서 기존에 제가 하고 싶었던 누군가를 가르치는 꿈, 교수까지도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꿈은 좀 이룬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어렸을 때는 하여튼 좋은 일 하는 사람 되고 싶었어요.

-(신 기자) 안 그래도 제가 대표님 이력을 조금 찾아봤는데요. 이제 승무원으로 5년간 일을 하시다가 29살 때 직접 컨설팅 업체를 설립을 하셨다고 혹시 설립하시게 된 계기도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허 대표) 승무원 생활 5년을 하면서 저는 제 인생이 바뀌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뭐 저희 집이 그렇게 풍요롭게 살던 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행기라는 것도 처음 타봤고 그리고 해외에 나가서 정말 새로운 문화를 접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다인 줄 알았는데. 그때는 지도를 좀 보더라도 대한민국이 가운데 있고 저희 때는 좀 그랬어요. 대한민국을 되게 크게 그려놨었거든요. 그래서 전 세계가 우리나라를 알 거라고 생각하고 했었는데 승무원 생활을 하다 보니까 우리나라를 모르는 나라가 많더라고요. 우리나라에 대한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그 시절이었죠. 제가 90년대에 비행기를 탔으니까요. 그때는 여하튼 승무원 생활하면서 '와 역시 배움이라는 것이 중요하구나' 그리고 '어디든 배움이 있구나' 이런 걸 좀 느꼈었던 것 같고요.그것을 좀 발판으로 새롭게 제가 창업해서 이러한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일을 좀 해봤으면 좋겠다 그런 차원에서 아마 거의 선두 주자로서 창업을 해서 일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런 것도 있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안 웃었어요.이렇게 부딪히면 화내는 나라. 우리 요즘은 부딪히면 어 죄송합니다라고 하거나 요즘은 문도 다 잡아주시고 그리고 쓰레기 막 버리는 거 안 되고 영화관 같은 데서도 서로 다 조심하는, 진짜 예의를 지금 잘 지키잖아요. 근데 그때만 해도 진짜 무서운 나라라는 얘기 많이 들었었어요.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냐고 근데 그런 것 때문에 우리나라가 엄청나게 강한 나라이고 그리고 진짜 열심히 일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인정을 못 받는다라는 생각을 좀 해 가지고. 그런 부분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그런 직업을 갖고 싶어서 창업을 하게 됐습니다.

-(최연혁 교수, 이하 최 교수) 아까 문을 잡아주는 그런 것은 저는 참 신선하게 제가 받아들였는데요. 해외에서는 그런 사례들이 사실은 많잖아요. 배려 배려나 포용이나 이런 것들이 많은데 해외를 많이 다녀보셨기 때문에 그런 것을 미리 아셨나요? 그런 것들을 한번 체험을 해보셨습니까? 해외를 많이 다니셨죠?

▲(허 대표) 네. 승무원 하면서 전 세계를 다 다녔기 때문에 좀 깜짝 놀랐었던 것은 그 무언가를 구매하고 as가 되는 거에 좀 놀랐고 as가 될 때 상당히 친절하게 as를 해주더라고요.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는 당연한 거잖아요. 근데 90년대나 80년대에는 그런 게 없었어요. 이걸 어떻게 바꿔 사 갖고 왔습니까? 그냥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그런 as가 잘 되지 않았죠. 근데 그때 선배들이 선배들이 옷을 사 가져 와서 보더니 "아 이거 문제가 있다" "별로 마음에 안 들어" 그리고 환불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가능해요?" 했더니 그냥 웃으면서 환불을 해주더라고요. 저는 그것도 너무 충격적이었고 그리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하와이나 어디를 갔는데 그냥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하이" 하고 인사를 하더라고요. 눈을 바라보면서 그럴 때 괜히 움츠리잖아요. 저는 그땐 그랬던 것 같은데 조금씩 저도 보면서 웃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되면 그 인상이 좋아지죠. 그리고 파리에 갔을 때도 에펠탑을 찾아가잖아요. 저희가 에펠탑 보러 가겠다. 근데 길을 모르니까 그때는 뭐 네비도 없고 뭐 이런 핸드폰에 이런 게 없던 때니까 지도 보고 찾아가야 되는 건데 어떤 할머님께 여쭤봤어요. "에펠탑 어떻게 가냐. 저기 보이는데 도저히 모르겠다" 했는데 그분이 영어를 이제 잘 못 쓰시는 거죠. 그런데 진짜 교과서에 있던 그대로 그분이 갑자기 제 손을 잡고 저를 에펠타까지 데려다 주셨어요. 그때 제가 느꼈던 파리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한 그 가치는 거의 한 200점 이상 올라가더라고요. 와 이 나라는 진짜 친절하고 관광을 또 오고 싶은 곳 이런 생각이 들고 또 부딪히는 경우가 없더라고요. 뉴욕에 갔는데 사람이 많으면 부딪히잖아요. 그런데 부딪히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부딪히면 또 암쏘리 하던가 뭐 익스큐즈미를 하더라고요.

이런 게 선진국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도 이런 문화를 좀 가르치는 곳이라든가 그런 게 있나라는 걸 좀 알아봤었던 거고 이걸 알아보니까 이런 걸 '브랜드 가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런 거를 내가 좀 주도적으로 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죠. 물론 뭐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요. 원래는 끝까지 해서 이 사무장까지 해보고 싶었는데 허리 디스크로 좀 일을 계속하기가 좀 어려워서 그만두고 나서 제가 그냥 하고 싶었던 거 가르치면서도 대한민국을 좀 알릴 수 있고 우리나라가 내가 좀 도움이 되는 그런 일을 하면서도 돈도 벌고 싶다 이런 마음에 시작했던 게 그 이미지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근데 하늘이 저에게 주신 하나의 고마운, 저만의 성격 중에 하나는 늘 그 안에서 좀 배우려고 하는 게 있었던 거 그리고 늘 궁금함이 좀 많았어요.

그 승무원 하면서 또 도움이 됐었던 것은 그 승무원 비행기 안에 보면 퍼스트 비즈니스 이코노믹 클래스가 있거든요. 거기 있는 사람들도 분석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퍼스트 클래스에 있는 사람과 비즈니스 클래스에 있는 사람과 이코노믹 클래스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 패턴 이런 것도 좀 보다 보면은 확실히 좀 다르다라는 걸 좀 느끼는 것도 있었고 그리고 또 비행기 안에서는 파일럿이 대통령이거든요. 그리고 이제 그 안에서 저희가 뭐 또 이 하나의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가는 거죠. 몇 시간 동안이긴 합니다만 하늘에서는 그게 하나의 조그마한 나라니까 그랬을 때도 책임감이라는 걸 서비스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는 환하게 웃고 음료를 나눠주는 그런 사람으로만 생각하지만 해외 비행기를 아마 타보시면은 뭐 연세 있으신 분들도 같이 막 하는 걸 보셨을 텐데 사실 안전을 책임지는 분들이죠, 첫번째는.

그리고 두 번째가 이제 서비스를 하면서 더 즐겁게 어떻게 이 비행을 할 수 있느냐 이런 것들을 하게 될 텐데 제게는 진짜 너무나 큰 선물 같은 직업이었다. 그리고 제가 이 일 지금 현재 국회의원을 했었고 그리고 정치인 개혁신당의 당 대표로서 일을 할 때도 그때의 봉사 정신 그리고 세상에는 이렇게 뭐 등급을 나눌 수는 없지만, 나누고 싶어서 나눠지는 건 아니지만 포스트 비즈니스 이코노미 클래스가 있다 이런 것도 좀 알게 되고 그 안에서 내가 해야 될 역할 뭐 이런 게 저한테 큰 도움이 된 것 같다라는 생각이고.

-(최 교수) 정치인으로 입문하시기 전에 컨설팅 업체를 그럼 몇 년 동안 하셨는

▲(허 대표) 제가 20년 했습니다, 20년.

-(최 교수) 일단 그럼 시작부터 조금 여쭤보고 싶은 게 '예라고'라는 이름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습니까?

▲(허 대표) "'예'라고 하겠습니다"라는 뜻에서의 예라고입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대한민국을 제대로 알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 그 슬로건은 친절 강대국 대한민국이었는데 그러면 대한민국을 알리고 싶은 거면 우리나라 말을 쓰고 싶었어요. 이 회사 이름 자체도. 그래서 계속 고민을 하다가 '아 뭐로 해야 되지' '뭐로 해야 되지' 했는데 제가 이제 전화를 받을 때마다 "아 예, 예" 이렇게 이제 대답을 하나 봐요. 그래서 저희 후배가 아 언니는 맨날 "예"라고만 해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그때 그 예라고가 딱 와닿더라고요. 그래서 그 예라고가 say yes라는 뜻도 있고 그리고 우리나라 전통의 '예'라고 뭐 이렇게 하면서 제가 그 이름을 좀 만들었습니다.

이름이 예라고라고 하니까 그 사장의 이름은 기억을 못해도 저희 회사 이름은 정말 오래 기억을 하셔 가지고 5년 뒤에도 "여기 예라고 맞죠?" 하고 전화를 주시는 경우들이 있더라고요.브랜드라는 게 그때부터 진짜 중요하다는 걸 알아서 제가 정치하는 데도 도움이 좀 많이 되는 것

-(최 교수) 네 이름도 특이했지만 물론 활동도 또 그 다양한 분들도 만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셨겠죠 조금씩 소개해 주시죠.

▲(허 대표) 처음에는 고객 접점에 계신 분들 위주로 제가 그 교육을 하고 컨설팅을 했었습니다. 접점에 계신 분들이 어떻게 고객을 응대해야 되는지 왜냐하면 제가 승무원 출신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걸 가지고 진행을 했었는데 어느 순간 이게 응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그게 바로 시스템이었죠. 그러니까 이 회사의 구조가 어떠냐에 따라서 지시가 되고 그걸 또 이행해야 되고. 그리고 요즘에 이제 많이 말하는 노사의 문제도 있는 거고 시간 8시간을 일하냐에 따라서, 그러니까 얼마나 처우가 되느냐에 따라서 사실 정말 웃고 싶은데 24시간 일하면 웃기 어려울 수가 있고.

그리고 예를 들면은 그 온라인 게임 업체인데 그분들이 유저가 좀 강한 강성들이 좀 있으셨어요. 그래서 이게 돈이 오가는 부분이 되다 보니까 서비스하는 사람들을 찾아와서 정말 오물도 던지고 칼도 갖고 오시고 막 이런 부분들이 있으면서 경찰과 대치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은 그런 게 있었거든요. 그렇다면 그 현장에서 서비스를 제대로 웃으면서 할 수는 없는 부분이거든요.그러면 우리의 직원들이 안전하게 이 서비스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냐라는 것 때문에. 예를 들어 이 단을 조금 더 높이고 뭐 CCTV를 달 때도 소리가 꼭 녹음이 되는 CCTV를 단다거나 이런 하드웨어적인 것들. 그리고 또 고객 리스트를 이제 어쩔 수 없이 먼저 보고 사람을 만나가게 한다거나 하는 그런 시스템적인 변화 그리고 요즘에는 여러분들이 번호표 뽑고 하지만 그게 다 이 컨설팅에서 나온 겁니다. 운 나쁘면 내가 먼저 왔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하고 그런 경우도 있었어요.

과거에는 그런데 접점의 서비스의 시스템을 바꿔서 번호표를 뽑으면 온 순서대로 진행할 수 있고 막 나오잖아요. 그런 것들을 바꿔 나가는 걸 진행을 했었습니다. 근데 하다 보니까 이제 이게 접점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리더의 문제가 있다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리더가 풀어줘야만 해결되는 게 있는 거죠. 그 다음부터는 이제 리더 교육을 제가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리더 교육을 또 하다 보니까 가장 중요한 게 경영자더라고요. 그래서 경영자들 교육을 하기 위해 제가 박사 과정까지 하면서 아무래도 눈높이를 좀 맞춰야 되니까 그때 프레젠트 아이덴티티라는 PI에 대한 중요성을 좀 더 공부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 기업의 오너들과도 일을 해 왔었죠.

경영자가 크게 이제 목표 지향을 정하고 또 심볼을 어떻게 하느냐도, 슬로건을 어떻게 하느냐도, 광고를 어떻게 하느냐 뭐 여러 가지의 문제가 한꺼번에 그 회사에 대한 브랜드가 정해지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그 사장 그 오너들까지도 제가 컨설팅을 하게 했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워커홀릭이 될 수밖에 없었고 공부도 꾸준하게 했고 열심히 일을 했던 것 같고요. 이제 그러다 보니 기업이 일하는데 정치인들이 어떻게 하느냐, 이 정치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이 기업이 또 달라지는구나 라는 거를 좀 알게 됐죠. 그러면서 또 운 좋게 이렇게 대선 캠프 같은 데서도 저를 좀 sos 치는 분들이 계셔서 그런 관련된 것도 조금씩 해드리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제 얘기를 좀 아주 길게 신나게 하네요.

-(최 교수) 한번 듣고 싶었습니다.

▲(허 대표) 너무나 오래된 얘기인데 새록새록해요.

-(최 교수) 정치라는 것이 이제 말과 설득일 텐데 이미지와 어떻게 보면 맞닿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과 설득 그리고 소통인데 어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서의 이미지 이렇게 연결되는 고리들이 있을 텐데

제가 생각할 때 정치의 기본은 소통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국민과의 소통이 정말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근데 이제 이미지라는 것은 abc라고 해서 appearance(외모), behavior(태도), communication(소통) 이걸 이제 이미지라는 작은 영역에서는 그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appearance는 이제 외적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뭐 이런 것들, 보여지는 거. behavior 같은 경우는 태도를 보면서 아 쟤 정말 싸가지 없다 아니면 뭐 좋다 이런 얘기 하잖아요. 그다음에 c가 이제 communication이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은 말을 하는 것도 있습니다만 사실 뭐 appearance도 메시지고 behavior도 메시지거든요. communication도 말하는 것도 있지만 우리가 SNS로 어떻게 커뮤니케이션 하는지 뭐 이런 것들도 다 커뮤니케이션이죠. 그 부분을 관리하는 게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저 같은 경우는 그런 abc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전략을 좀 더 많이 짰었고 그 안에서 이제 프레지던트 아이덴티티라고 하는 PI를 주력적으로 이제 전략을 가지고 했었던 거였죠. 그리고 사실 정치는 이미지죠. 정치는 제가 그거를 인정하게 되더라고요. 4년 정치해 보니까. 그리고 제가 대선 캠프에 4번 참여했었었거든요. 그런데 결국은 마지막은 이미지구나. 왜냐하면 내가 아무 정말 괜찮은 이 코어에 훌륭한 것이 있더라도 제대로 국민께 그 커뮤니케이션을 못하면 제대로 전달을 못하면 그건 당선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 이미지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라는 생각입니다.하지만 제가 또 강조하는 것은 그 이미지는 뭐 첫인상 중요하고 끝인상 중요한데 끝인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리고 이미지라는 것은 그 behavior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한 번에 끝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그냥 겉모습만 하시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늘 시간이 답을 준다라는 말씀을 많이 드려요. 그 사람이 걸어왔던 궤적들을 보면서 이미지가 형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뭐 막말하는 사람이지만 그 막말을 통해서 성과를 계속 냈던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저희는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죠. 그리고 그 사람이 셀럽이 되기도 하죠. 예를 들어 연예인들도 떠오르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그러니까 뭐 유재석이라는 사람은 또 유재석의 색으로 자기의 그 행동들을 쭉. 저는 박진영을 너무 좋아하는데 박진영이라는 사람도 그 사람이 걸어왔던 길을 통해서 '박진영이 추천하는 사람이라면 좀 믿을 만할 것 같아' 'JYP는 뭔가 할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드는 그게 이미지 그게 가장 강력한 이미지거든요.

그래서 쇼는 그 진짜 내가 응축된 내 행동에서의 그 쇼를 했을 때 그게 효과가 나는 거고 국민도 믿어주는 거지, 진정성 없이 어느 순간 했던 쇼는요 한두 번 하면 다 들킵니다. 그래서 뭐 그런 부분이 정치에서도 좀 반영이 돼야 된다. 정치인들 중에서 그냥 몇몇 쇼만 하면 된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계시는데 요 며칠 한번 보십시오. 망가지는 부분 분들 많으시잖아요. 제가 그렇게 이미지를 했던 사람인데 왜 이렇게 튀려고 안 하겠어요?

-(신 기자) 또 대표님께서 이렇게 열심히 발로 뛰셨던 결과가 정치 입문 계기로 이어지셨잖아요. 2020년 1월에 자유한국당의 이미지 컨설턴트도 영입되셨다고 혹시 좀 그 영입되셨을 때 어떤 마음이셨는지

▲(허 대표) 어우 진짜 그때는... 제가 가장, 그러니까 우리 아이를 제외하고 우선순위로 가장 사랑하는 게 예라고라는 회사였거든요. 그냥 저와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곳이라서 그냥 가족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회사였는데 제가 정치권에 들어오면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가 없다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때도 보수가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죠. 4~5% 나온 적도 있었고 17~18% 나오고 막 그랬을 때였을 겁니다. 그때 인재영입위원장께서 저를 좀 찾아오셨습니다. 저를 찾아오셔서 "우리 당을 좀 살려달라". 그러니까 기존에 이제 위원들이 저한테 영입을 요청하셨을 때는 다 거절했죠.

저는 일이 좋기 때문에 이제 거절을 했었다. 그러니까 19년 12월에 저한테 요청을 하셨었는데 여튼 보수가 무너지고 있었고 그분들이 생각하실 때는 자신들의 그 꼰대 이미지와 이 당의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이제 그런 일을 하던 저를 찾았던 것 같고 어 그때 제가 방송 패널로 이렇게 나가고 있었을 때였는데 그때 제가 정치에 관심이 없었는데 조국 사태가 있었습니다. 저는 울분에 찼었거든요. 저는 그 사다리를 상당히 중요시 여기고 공정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거든요. 왜냐. 기업을 할 때도 공정한 거래가 아니면 안 되고 아니면 저희가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공정과 책임이라는 걸 너무나 중요시 여기는데 공정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렇지 않아도 약간 울분은 있었어요.

근데 또 그쪽에서 요청을 하셔서 가족과 좀 상의를 했는데 뭐 가족이 엄청나게 반대하고 딸도 너무나 반대를 해서 고민이 많았었죠. 그런데 이제 마지막에 인재영입위원장이 저희 회사로 찾아오셔서 정말 울면서 말씀하셨거든요.
"우리 당 때를 벗겨 달라" "하자는 대로 할 것이다" 그러니까 왠지 또 이게 또 애국심이 또 나오는 거예요. 제가 기업을 할 때도 '우리나라가 좀 괜찮은 나라라는 걸 좀 알리고 싶다' 이런 느낌으로 시작을 했었던 것처럼 '내가 할 일이 있다면 지금 가야 되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 달 좀 넘게 고민하다가 1월달에 이제 인재 영입이 됐던 거죠.

-(신 기자) 그 가족분들께서 그때 반대하셨던 이유는 혹시

▲(허 대표) 우리 딸은 그냥 빨간 당이 싫다고 그랬어요. 그때 워낙에 이미지가 안 좋았어요. 지금의 국민의 힘보다 더 안 좋은 건 지금은 20 몇 퍼센트라도 나오잖아요. 국민의 힘이 그때는 10%대였을 겁니다.

-(신 기자) 그때 따님 어떻게 설득하셨나요?

▲(허 대표) "엄마 한번 믿어주면 안 될까". 그리고 뭐 제가 인재영입이 된다고 해서 의원이 되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그런데 이제 "엄마 한번 믿어주면 안 되겠니" "엄마 생각에 엄마가 정말 보수일까 뭘까 고민을 해봤는데 내가 보수라는 정체성에 좀 맞는 것 같고 그리고 이러이러한 엄마가 잘 가장 잘하는 이 전문성을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 막 설득 엄청 했죠. 그래서 "그럼 거기까지만이야" 막 이랬는데 지금 이제 5년 됐죠, 정치한 지. 근데 다행히 우리 딸이 지금은 말리지는 않고요.

저한테 이번에 그거 물어보더라고요. (딸이) "엄마가 만약에 국민의 힘에 있었다면, 그리고 엄마가 만약에 그래서 국회의원이 됐다면 엄마는 찬성했을 것 같아 탄핵 반대했을 것 같아?", "엄마는 저기 안철수 의원 앉아 있는 것처럼 거기 앉아 있었을 것 같아, 아닐 것 같아?" 뭐 이렇게 묻더라고요.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해, 엄마가 어떻게 할 것 같아" 했더니 "나는 엄마는 그 자리에 앉아서 찬성표를 누를 것 같아"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제가 "그게 엄마야" 그렇게 얘기했거든요. 저희 딸이 이제 저를 바라보는 그 모습과 그게 제가 5년간 정치에서 보여줬던 제 모습을 그대로 제 딸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감사했고. 만약 정말로 제가 국민의힘이 아직 있더라도 저는 분명 찬성표를 던졌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고 그게 안 될 것 같으니까 제가 국회의원 시절에 탈당하고, 국회의원직 버리고 개혁신당에 올 수 있었던 거 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딸에게 당당하게 얘기합니다. 근데 만약 엄마가 처음에 생각했던 그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난 정치를 그만뒀으면 좋겠어라고 계속 얘기해요. "어 알겠다 그 약속은 지키겠다"라고 얘기하고 있고요. 저는 정치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또 마지막까지 진짜로 비겁하기 싫고요.

그리고 특히 '내 딸이 나를 보고 있다'라는 마음으로 정치하고 또 내 딸의 친구들, 내 딸의 선배들, 후배들을 위해서 나는 정치 해야겠다라고 마음먹고 갔기 때문에 뭐 힘이 있든 없든 제 자리에서는 계속 그렇게 정치인의 길을 갈 것 같습니다.

allpass@newspim.com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각설이 타령'은 광복군의 희로애락"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신개념 국악 방송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4편이 26일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스팟(K·SPOT)'을 통해 공개됐다.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은 국악이라는 전통 예술 분야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대중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려는 시도이다. 젊은 국악인들의 시선으로 전통음악을 재해석하고 현대사회 속 국악의 의미를 재조명하며, 소리꾼 최한이와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팝페라 가수 오윤석과 소리꾼 박나현, 김보성, 가야금 병창 박혜정 등이 출연한다.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의 제목 속 '작금(昨今)'은 역사적 사건과 역사적 인물 이야기를 국악으로 풀어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작금(作金)'은 '금을 캐 부자가 된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4편 '광복군'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 왼쪽부터 최한이, 김보성, 변상문. 2025.09.25 alice09@newspim.com 이날 제4편 '광복군'에서는 가야금 병창 박나현과 경기소리꾼 김보성이 함께했다. 4편 '광복군'에서는 의병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변 이사장은 "의병은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후, 1919년 9월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질 때까지 개인 신분으로 일제와 싸운 분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광복군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꼐 국군이 됐다"고 부연했다. 당시 독립군이자 광복군 출신으로 초대 국방부 장관을 맡은 사람은 이범석이며, 초대 국방부 차관은 최용덕이 맡았다. 제4편 '광복군'의 시대적 배경은 1944년 겨울이다. 변 이사장은 "평안도 출신 김준엽을 비롯한 1500여 명의 청춘은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20사단에서 4주간 훈련을 받고, 당시 중국군과 전쟁 중인 일본군에 배치됐다. 그런데 이들 중 40여 명이 일본군영을 탈영하게 된다. 대표적 인물이 전 고려대 총장 김준엽, 창작과 비평 출판사를 운영했던 장준하,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의 아들 노능서"라고 말했다. 최한이 소리꾼은 장준하의 '돌베개' 책 부분을 읽으며 "흥이 오르자 안익태 씨가 작곡한 애국가를 불랐다. 회식을 주관한 김주임은 사발가를 불렀다"고 말했다. 이어 "여기서 나오는 '사발가'는 1900년대 초부터 1910년 한일병탄 무렵까지 우리 민족의 울분을 노래한 곡"이라고 소개했고, 김보성 소리꾼은 가창을 시작했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4편 '광복군'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김보성 소리꾼. 2025.09.25 alice09@newspim.com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4편 '광복군'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박나현 가야금 병창. 2025.09.25 alice09@newspim.com 탈영한 이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 중앙육군군관학교를 마치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해당 자리에서 김성근이라는 청년은 '각설이 타령'을 부르게 된다. 박나현 소리꾼은 '품바'라는 가사가 들어간 '광복군 환영가'를 가창했다. 최한이 소리꾼은 이를 들은 후 "지금으로 말하면 타령은 강한 수능금지송이 됐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변상문 이사장과 최한이는 오늘의 '금맥'으로 "각설이 타령은 광복군의 희로애락 그 자체였고, 국악은 곧 군악이었다"고 정의를 내렸다. 올해 8월 15일 광복 80주년을 맞아 선보이는 특집 프로그램인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1화 '광복'은 총 4개로 나뉘어 방송됐다. 제1편은 '작금', 2편 '김구, 판소리 배우다', 3편 '이승만과 아리랑', 4편 '광복군'이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4편 '광복군'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 왼쪽부터 최한이, 김보성, 변상문. 2025.09.25 alice09@newspim.com 앞서 제1편 '작금'에서는 성악가 오윤석이 참석해 한국 가곡 '선구자'를 가창했다. 변사로 나선 변상문 이사장은 '가곡'에 대해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가곡'을 우리나라 전통 성악곡의 하나로, 피리나 거문고, 해금 따위의 관현악 반주에 맞춰 부르는 노래라고 정의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광복 80주년을 맞이해 뒤죽박죽 돼 있고 뒤섞인 개념을 정리해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가곡은 국악"이라는 답을 힘주어 말했다. 이어 제2편 '김구, 판소리 배우다'에서는 김구 선생이 왜인을 살해한 후 옥중 생활을 하며 만난 조덕근으로부터 시조와 여창 가곡, 남창 가곡, '경기 12잡가', '선유가', 판소리 '적벽가'와 '춘향가'를 배운 내용이 담겼다. 변상문 이사장은 "백범 김구는 판소리 '춘향가'를 배웠고, 판소리 '농부가'와 '갈까부다'를 즐겨 불렀다"고 말했다. 이에 최한이 소리꾼은 "판소리는 원조 K팝"이라고 정의했다. '이승만과 아리랑'이라는 제목의 제3편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93년 2월 24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본회의에 참석한 후 식사 자리에서 초대 대통령의 영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난 내용이 담겼다. 이 전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아리랑'을 불러줬다. 이에 최한이 소리꾼은 "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우리의 소리이다. '아리랑'은 한민족 DNA이다. 슬플 때는 발라드로, 기쁠 때는 찬가로, 힘들 때는 떼창으로, 인생사 희로애락의 뮤지컬로 시류를 편승하는 살아있는 맥"이라고 강조했다.   alice09@newspim.com 2025-09-26 16:05
사진
두나무·네이버 '슈퍼 플랫폼' 시동 [서울=뉴스핌] 전미옥 기자 = 두나무와 네이버가 가상자산 '슈퍼플랫폼' 탄생을 예고했다. 네이버페이에서 스테이블코인으로 상품을 결제하고 예치금은 업비트 계좌와 연동해 이자이익을 꾀하는 등 원화 스테이블코인 확장 가능성을 제시,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구상이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네이버파이낸셜과 두나무가 추진하는 포괄적 주식교환 거래 체결 시 양사는 원화 스테이블 코인의 발행과 유통, 활용을 잇는 삼각편대를 단숨에 완성할 수 있다. 네이버페이가 발행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두나무의 가상자산거래소 업비트에 유통하고 해당 코인을 네이버페이가 보유한 막대한 온·오프라인 결제처에서 지불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향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 대비 원화스테이블 코인의 활용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네이버페이와 두나무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구체적인 활용처와 확장 가능성을 제시,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점도 기회요인이다. 오동환 삼성증권 연구원은 "두나무의 블록체인 플랫폼 '기와체인'으로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고, 이를 네이버페이의 결제처에서 결제 수단으로 활용이 가능하다"라며 "또 업비트에서 거래하며 탈중앙화 금융의 기초 자산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네이버와 두나무의 업비트 로고.[사진=각 사] 특히 네이버페이는 최근 결제 뿐 아니라 대출, 보험 증권, 자산관리 등을 연계해 종합금융서비스로 도약을 꾀하고 있다. 두나무를 품게 되면 가상자산으로 사업영역을 넓힐 수 있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네이버페이, 업비트 고객들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또는 가상자산으로 네이버페이에서 물건을 구매·결제할 수 있고 네이버페이와 업비트 계좌가 상호 연동되면 기존 네이버페이 예치금을 업비트 계좌에 보관, 고객들이 이자수익을 꾀할 수도 있다. 이같은 가상자산 활용이 보편화되면 자연히 네이버-업비트 생태계에 고객을 묶는 '록인' 효과가 극대화된다. 이효진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네이버의 두나무 연결 편입은 단순 가상자산 거래대금에 대한 수익이 인식되는 것이 아닌 실물자산토큰(RWA), 스테이블 코인 등 디지털 자산 사업의 확대로 활용될 수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이번 네이버와 두나무의 합병 신호를 시장에 일종의 '선전포고'로 관측했다. 스테이블코인을 비롯한 가상자산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의지라는 것이다. 김형중 한국핀테크학회 회장은(고려대 교수)는 "네이버와 두나무가 힘을 합치면 스테이블코인의 쓸모를 만들어낼 수 있고 여러 가능성을 기반으로 주도권을 쥐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시장과 정부에 표현한 것"라며 "시그널을 던졌으니 시장 반응을 보고 세부사안을 정립해나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진=게티이미지] 임병화 성균관대 경영학과 교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법제화가 빠르게 추진되고 있는 만큼 카카오, 토스를 비롯해 은행 등 관련 기업들도 분명 컨소시엄 등 다양한 물밑 논의를 진행하고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미국, 유럽, 일본 등 해외에 비해 한국은 많이 뒤처져있기 때문에 당장의 규제보다는 산업육성이 우선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피력했다. 다만 제도적 걸림돌도 적지 않다. 더불어민주당 안도걸 의원이 대표 발의한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에서 이용자 보호를 위해 발행과 유통이 분리돼야 한다는 점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이때 발행, 유통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단순 해석하면 네이버에서 만든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손자회사인 업비트에 상장, 거래로 이뤄지기는 쉽지만은 않을 전망이다.  금융당국이 네이버와 두나무의 결합을 어떻게 평가할지도 변수로 꼽힌다. 가상자산 분야에서 금융당국은 소비자 보호와 산업혁신의 균형을 중시하며, 투자자 보호 중심의 규율체계 마련 등에 나서고 있다. 심원태 금융위원회 가상자산과 사무관은 최근 가상자산 관련 세미나에서 "국제금융안정위원회(FSB) 등은 미국의 가상자산거래소 FTX의 파산 사례를 들며 이해상충 방지, 경업 제한 등 대응방안 마련을 강조한 바 있다"며 "국내 가상자산 시장은 개인만 참여한다는 특수성이 있어 이용자 보호 측면을 보다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고 했다.  한편 전날 네이버와 두나무는 양사 간 포괄적 주식교환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네이버 계열사 네이버파이낸셜에 두나무가 편입되는 방안 등을 놓고 검토에 들어간 것이다. 포괄적 주식교환은 한 회사가 다른 회사의 주식 전부를 취득해 100% 지분을 확보하는 절차다. 구체적으로 두나무 주주들이 보유한 두나무 주식 전부를 네이버파이낸셜에 넘기고, 네이버파이낸셜은 신주를 발행해 두나무 주주들에게 제공한다.  네이버는 "두나무와 스테이블 코인, 비상장주식 거래 외 주식 교환을 포함한 다양한 협력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두나무 측도 "네이버페이와 스테이블 코인, 비상장주식 거래 외에도 다양한 협력을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양사는 조만간 각각 이사회에서 주식 교환 안건을 의결할 것으로 알려진다. romeok@newspim.com 2025-09-26 17:18
기사 번역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기사제목
기사가 번역된 내용입니다.
종목 추적기

S&P 500 기업 중 기사 내용이 영향을 줄 종목 추적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