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이 남긴 메시지
[서울=뉴스핌] 이영태 정치부 통일외교선임기자 = 제주도는 1991년 한·소정상회담을 통해 미·소 냉전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한 '세계평화의 섬'이다.
지난 24일부터 사흘간 열린 '제16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 취재차 제주도를 다녀왔다. 북핵과 미중·한일 갈등으로 얼어붙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구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란 고민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먼저 '신혼여행의 섬' 제주도가 '세계평화의 섬'으로 자리잡게 된 역사를 살펴보자.
1991년 4월 20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해 노태우 대통령과 2시간에 걸친 단독회담과 확대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에서 냉전종식과 평화정착,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협력전개 및 양국관계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로 합의했다. 당시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방한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오랜 우방국인 북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사됐다는 점에서 노태우정부 북방정책의 쾌거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소정상회담 이후 남한과 북한의 동시 유엔가입이 이뤄지고, 미국 일본 중국 등 주요국 정상들의 방문과 정상회담이 이어지면서 제주도는 국제정치에서 '화해와 평화의 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후 제주도는 1999년 제주도개발특별법을 개정하면서 '세계평화의 섬' 지정 조항을 신설해 본격적으로 초석을 다졌고, 2001년부터 제주평화포럼을 개최하면서 명실공히 '평화의 섬'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2005년 1월 27일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세계평화의섬' 선언문에 서명하면서 제주도는 '평화의 섬'으로 공식 지정됐다.
'평화의 섬'이란 개념을 처음 제시했던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지난 25일 '한소정상회담과 세계평화의 섬 제주'를 주제로 열린 제주포럼 전체세션2에 참석해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이 제주에 온 의미를 생각했을 때, 이것을 계기로 제주에 새로운 국제적 위상을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에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오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제주도에는 '삼무정신'이 있다. '도둑'이 없다는 것은 위협이 없다는 것이고, '거지'가 없다는 것은 착취가 없다는 것이고, '대문'이 없다는 것은 안전과 신뢰가 있다는 것"이라며 "이것이 평화의 정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평화의 섬' 담론이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문 이사장은 한소정상회담 직후 같은 해 5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태평양의 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회의'에서 제주대 고성준·양영철 교수와 함께 '신혼여행의 섬에서 평화의 섬으로'를 발제하면서 '평화의 섬 제주'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시켰다.
'세계평화의 섬' 제주의 탄생 배경인 한소정상회담 세션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비주얼 씽킹 이미지. 2021.06.30 [이미지=제주포럼2021] |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도 이번 제주포럼에 영상으로 참여했다. 그는 '글로벌 평화도시 연대' 세션에 보낸 축사를 통해 "냉전시대 종식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날 인류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게 됐다"며 "전쟁과 군비증강으로는 오늘날의 과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주포럼에서 논의되는 의제를 보며 미래를 향한 우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고, 대체로 동의하게 됐다"며 "우리는 종종 미래에 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세계가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는 우려가 있는데, 어떤 결정을 하게 될지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특히 "전쟁은 정치의 실패, 패배를 의미한다"며 "안보라는 것은 인간의 시급한 요구사항과 인간의 삶을 존중하는 데 우선순위를 부여해야 한다. 과도한 군비 지출 대신 교육, 보건, 결핵, 에이즈, 새로운 치명적인 질병인 코로나19와 같은 문제 해결에 국제사회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인류는 서로 도움을 주며 도전적인 과제에 함께 대응해 나가고자 한다. 국제질서를 재편함으로써 전세계 모든 시민들이 안전한 삶을 영유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남북철도연결과 러시아 카드를 한국 외교 레버리지로
문제는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한다고, 고르바초프가 전쟁과 군비증강을 반대한다고 해서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북핵'이 사라지고 미중갈등과 한일갈등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남과 북,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이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는 한반도와 동북아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떠오른 생각이 바로 남북철도연결과 러시아 카드다.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최후의 카드로 검토중인 남북철도연결에 대해선 대북제재의 키를 쥐고 있는 바이든 행정부도 크게 부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개성공단이나 금강산관광 재개보다도 북한 경제에 주는 실익이 클 수 있다는 점에서 실제로 가시화될 경우 남북대화와 북미대화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북한을 유인할 수 있는 좋은 카드가 될 수 있다.
러시아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미중갈등 속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는 한국이 외교 다변화 측면에서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대안이다. 현 정부가 신북방정책과 신남방정책을 통해 미국과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의도와도 일치한다. 1990년 수교 이후 30여 년간 사실상 방치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양국 외교관계를 이제는 바꿀 때가 됐다는 말이다.
물론 지금의 남북관계와 한반도 주변상황을 고려할 때 러시아가 북핵문제를 해결하고 미중갈등을 종식시킬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만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는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신냉전구도를 약화시킬 수 있고 향후 한국이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다자안보협력체제를 마련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지렛대(레버리지)가 될 수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1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무력 충돌과 핵무기 통제를 위한 전략핵 안정에 합의했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러 갈등 속에 주재국을 떠났던 양국 대사의 임지 복귀에도 합의했다. 우크라이나와 인권·사이버 문제 등에 대한 이견은 여전해 임시 봉합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는 평가다.
미러정상회담은 미국으로선 중국 견제를 위해 러시아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고, 크림반도 합병 등으로 국제사회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로선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절실했다는 점에서 상호 이해관계가 절충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가만 있을 중국이 아니다. 미러정상회담을 지켜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28일 푸틴 대통령과 화상 정상회담을 갖고 올해 20주년을 맞은 중·러 우호협력조약의 연장을 공식 발표했다. 특히 코로나19의 정치화에 반대한다며 민주와 인권을 내세워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한다고도 했다. 사실상 미국을 겨냥한 공동 대응 의지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도 이렇듯 이해와 필요에 따라 만나고 타협하는 것이 외교다. 전쟁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이 절실한 한국의 선택은 무엇일까?
제주도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북한을 통과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파리로 가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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