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3인조 강도 침입...흉기로 위협 손발묶고 담요로 덮어
대형가방 3개에 옷가지부터 식재료, 슬리퍼까지 몽땅 쓸어담아
강도는 준박사학위 소지자-교사-기술자...보드카 마시며 대화도
[서울=뉴스핌] 김흥식 객원논설위원 = 실패한 쿠데타 사건에 이은 소련 공산당 해산, 임박한 고르바초프 실각 등 일련의 사태로 취재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수선하던 91년 9월 어느 날 필자로서는 평생 잊을 수 있는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된다.
당초 어학연수가 10월까지로 예정돼 있었지만 현장 취재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회사의 요청으로 결국 연수를 중단했다. 연수 계약업체로부터 돌려받은 약간의 돈으로 월세 1백달러의 허름한 아파트에 들어갔다. 회사에서는 당초 발령된 연수 기간까지는 모스크바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다. 규정상 별도 지원은 없다고 통보했다.
결국 출장 취재도 아니고 연수생도 아닌 어정쩡한 처지에서 특파원 같은 취재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사관 관계자와 현지 지인들이 외국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운 열악한 아파트이라며 걱정했지만 조심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이 기회에 서민생활을 들여다보자는 호기심과 모험심이 발동한 탓도 있었다.
[서울=뉴스핌] 모스크바 시내 (2008.09.29) |
◆아파트에 3인조 강도 침입...흉기로 위협하며 손발 묶고 담요로 덮어
사건이 일어난 건 9월 어느날 저녁이었다. 모스크바의 모 호텔에서 열린 진도모피 전시회를 둘러보고 8시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컴컴한 복도에서 2층의 아파트 문을 여는 순간 써늘한 느낌이 목뒤에 느껴졌다. 칼날이었다.
그들은 전등불도 없는 어두운 복도 계단에 숨어서 필자를 기다렸던 것 같았다. 계획적인 게 분명했다. 덜덜 떠는 필자를 아파트 안으로 밀어넣으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찌허 찌허(조용히 조용히)”를 반복했다.
3명이었다. 조용히만 있으면 해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들의 기색은 싸늘하고 험악해 보였다.
40대 정도의 나이에 중키인 남자가 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보아 두목인 것 같았다. 나머지 2명은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키도 크고 몸집도 우람했다. 그들은 익숙하게 필자의 손발을 묶고 입을 테이프로 틀어막은 후 소파에 눕히고는 담요로 덮어버렸다. 완전히 기가 꺾인 필자는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하루 200 달러 상당의 호텔에 투숙하며 여유있게 취재를 하는데 월세 100달러 짜리 허름한 아파트에 머물다 이런 꼴을 당하다니! 후회와 분노의 감정이 온몸을 파고 들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어릴 적의 기억부터 방금 전까지의 온갖 일들이 뇌리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특히 좋았던 기억보다는 잘못한 일, 후회되는 일들이 온통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1시간 정도 지나자 조금씩 진정되었다. 서울의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어떻게 하든 살아야겠다는 각오로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다.
이들과 부드럽게 말을 섞다보면 끔찍한 일은 당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덮혀진 담요 속에서 꿈틀거리며 뭐라고 중얼거리자 그들은 필자를 팔다리가 묶인 채로 소파에 일으켜 앉혔다. 입을 막은 테이프는 떼어주면서 소리 지르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위협했다.
영화 '바르게 살자' 스틸컷<출처:네이버> |
◆대형 가방 3개에 옷가지부터 식재료, 슬리퍼까지 모조리 쓸어담아
둘러보니 두목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고 부하들은 가져온 이민빽 같은 큰 가방에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쓸어담고 있었다. 처음에는 옷가지, 책, 시계, 녹음기, 카메라, 카세트, 외화상점에서 산 음식재료 등 필자의 물건들을 집어넣었다. 심지어 신고 다니던 구두와 너덜너덜한 슬리퍼까지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가져갈게 없자 집주인 물건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주인 물건은 놔두라고 사정했지만 들은 척도 안하고 옷가지, 식기 등 닥치는대로 집어담기에 정신이 없는 듯했다. 냉장고 안에 보관중이던 주인 소유 식재료도 모조리 쓸어넣었다. 그렇게 해서 약 3시간에 걸친 작업이 끝났다. 3개의 큰 가방이 불룩할 정도로 가득 채웠다.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게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어두운 불빛아래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무언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왜 가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나가면 불심검문에 걸릴 수 있다’며 동이 틀때까지는 나갈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앞으로 5시간 정도를 더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했다. 떠날 때까지 그들의 불측한 마음을 어떻게 누그려뜨리는냐가 생사의 갈림길이 될 터였다. 악몽같은 순간순간이었다. 어느새 가누기 어려운 공포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내가 살아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제일 나이어린 녀석이 책상 위에 놓인 보드카 한 병을 보자 환호성을 질렀다. 갑자기 방안 분위기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 술은 러시아산보다 도수가 훨씬 높은 몽골산 보드카로, 회사에서 출장왔던 선배가 준 것이었다. 그들은 신이 나서 돌아가며 몇 모금씩 병나발을 불었다. 나중에는 필자의 머리를 뒤로 잡아채 입안으로 술을 들이부었다. “마시고 잠이나 자라”고 하면서. 싫다고 도리질을 쳤으나 항거불능이었다.
[모스크바 로이터=뉴스핌] 정윤영 인턴기자 = 13일(현지시각)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폭설이 내린 가운데 남성 한 명이 차 위에 내려앉은 눈을 걷어내고 있다. 2019.02.13. |
◆강도는 준박사학위 소지자-교사-연구소 기술자...새벽까지 보드카 마시며 대화
독주를 마신 탓인지 약간의 용기가 생겼다. 짧은 러시아어로 두목과 대화를 시작했다. 순순하게 대화에 응하는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다. 필자의 러시아어가 신통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독일어나 불어로 해도 좋다고 했다. 그래도 러시아어로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그럭저럭 대화를 이어갔다.
두목은 자신을 준박사 학위를 가진 자칭 지식인이라면서 부하 2명도 대학졸업자로 학교 교사와 연구소 기술자로 각각 근무한다고 말했다. 필자도 자기소개를 했다. 서울에서 왔고 앞으로의 비즈니스 사업을 위해 어학연수차 모스크바에 온 것이라고 소개했다. 기자라고 하면 해코지를 할지도 몰라 숨겼다. 두목은 88서울올림픽을 TV로 봤다면서 한국이 잘 사는 나라인 것 같다며 부러움을 표시했다.
러시아인은 원래 선량하고 순박한 사람들인데 외국인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했더니 두목은 거듭 미안하다며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얘기 꺼리가 별로 없어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자 필자가 학창시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는 말을 했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참회하는 내용을 들먹였다. 갑자기 두목의 얼굴이 이그러지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얘기를 하는 저의가 뭐냐. 라스콜리니코프는 사회악을 제거한다는 소영웅심에서 전당포 노파를 죽인 것이고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는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 우리도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아이들 먹을거리조차 없어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이른바 ‘생계형 범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절망에 일말의 동정이 가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런 식의 대화를 계속하다가는 엉뚱한 상황이 될 지도 몰라 입을 다물었다. 술도 떨어지자 그들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담배만 계속 피워댔다. 뿜어낸 담배연기로 그들의 얼굴조차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지난 5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 [사진=로이터 뉴스핌] |
◆먼동 트자 대기차량 타고 사라져...현지 경찰 조사, 모스크바 방송서 보도
시간이 흘러 창문을 통해 보니 먼동이 트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자기들 키 만한 이민 빽을 하나씩 들고 나갔다. 대기차량이 있었던 모양이다. 범인들의 인상착의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운 걱정거리로 다가왔다.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속삭이는 걸 보니 필자를 어떻게 처리할 지를 놓고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필자의 사건기자 경험상 강력사건에서 범인의 얼굴을 안다는 게 자칫 잔혹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기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삶과 죽음이 한끗 차이로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의도를 떠보기 위한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다. 어느 정도 말문이 트였다고 생각한 두목에게 간곡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냈다. “당신들이 가져간 물건 중에 손목시계가 있다. 그 시계는 아내가 결혼선물로 준 것이다. 일생동안 차기로 약속했다. 손목시계만이라도 돌려주면 고맙겠다. 당신들의 어려움을 이해하며 절대 원망하지 않겠다”
두목은 잠시 생각하더니 부하들에게 시계를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아직 가지고 나가지 못한 한 개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에 쑤셔넣었는지 30분이 지나도록 찾지 못하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두목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 당신 아내에게 미안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들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라며 필자의 손과 발을 다시 한 번 묶고 입에 테이프를 붙였다. 그리고는 ‘다 스비다니야’(안녕)‘라는 말과 함께 내 어깨를 한 번 툭 치고 사라졌다.
테이프로 입을 가리고 손발이 꽁꽁 묶인 채로 깡충깡충 뛰며 옆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이 필자 키보다 높이 달려 있어 점핑을 해서 이마로 박치기하다시피 했다. 손발이 꽁꽁 묶인 모습을 본 이웃집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문을 닫아버렸다. 다행히 옆집의 할아버지가 나와 칼로 손목 묶인 끈을 잘라 주었다.
연락을 받은 대사관 직원들이 달려오고 곧이어 대사관의 신고를 받은 모스크바 경찰국에서 나왔다며 바바리 코트 차림의 형사 몇명과 정복 경찰관들이 경찰견을 앞세우며 들이닥쳤다. 단서를 찾는다고 방안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며칠 뒤 범인 몽타쥬를 만든다며 경찰국에 출두하라는 연락이 왔다. 경찰국 소속 전속화가가 필자의 설명을 듣고 1시간만에 두목의 몽타주를 그렸는데 실제모습과 아주 비슷했다. 모스크바 방송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필자의 강도 피습사건을 보도했다.
난리가 일단 정리되고 나서 9시간 동안 벌어진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한바탕 악몽을 꾼 것 같았다. 매 순간 그들의 말투와 표정에 따라 안도와 걱정을 반복하며 견뎌내야 한다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다. 불가에서는 사람의 일생을 손가락 한번 튕기는 정도의 순간이라고 한다는데 그 9시간은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우리나라의 안전한 치안에 대해 새삼 고마움을 느끼는 기회가 되었다. 강도사건을 겪고도 특파원으로 바로 부임했으니 러시아와의 인연은 질기고도 질겼다.
[모스크바 로이터=뉴스핌] 백지현 수습기자 = 사람들이 일몰시간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모스크바 시티'라고 불리는 국제 비즈니스 센터 안 전망대에서 도시전경을 바라보고 있다. 2019.04.23 |
▲김흥식 뉴스핌 객원논설위원
한국외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1977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직되는 아픔을 겪고 쌍용그룹에 몸담고 있다가 1988년 연합뉴스 기자로 복귀했다. 1991년 한국의 첫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파견돼 맹활약했다. 이후 연합뉴스 북한부장, 남북관계 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실 간사, 경영기획실장을 거쳐 편집담당 상무이사를 지냈다. 퇴임후 연합뉴스 부설 동북아센터 상임이사, 중소기업진흥공단 비상임이사, 도로교통공단 비상임이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특별위원 등을 지낸뒤 현재 뉴스핌 객원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k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