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KYD 디데이
외신출처 로이터

속보

더보기

'태국 동굴 소년' 기자회견…"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로 배 채워"

기사입력 : 2018년07월19일 10:05

최종수정 : 2018년07월19일 10:05

※ 본문 글자 크기 조정

  • 더 작게
  • 작게
  • 보통
  • 크게
  • 더 크게

※ 번역할 언어 선택

처음이자 마지막 기자 회견
"탐험 한 시간 예상해 음식 안 가져가"

[서울=뉴스핌] 김세원 인턴기자 = 태국 북부 치앙라이주(州) 탐루앙 동굴에 17일간 고립됐다가 기적적으로 구조된 태국 소년 축구단이 공식 석상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로이터통신은 12명의 소년과 코치가 18일(현지시각) 병원에서 퇴원 절차를 밟은 후 치앙라이주 정부 청사로 이동해 처음이자 마지막 기자회견을 가졌다고 같은 날 보도했다.

치앙라이주 정부 청사에서 마련한 기자회견장에서 태국 소년들이 구조 작업 중 산소 부족으로 사망한 태국 해군 네이비실 출신 사만 쿠난이 그려진 그림을 들고 있다. 아이들과 코치(왼쪽)은 기자회견 중 사만 쿠난을 추모했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11~16세로 구성된 태국 '무 빠'(야생 멧돼지) 유소년 축구팀 소속의 12명의 아이와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본 엑까뽄 찬따웡(25) 코치는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기자회견장에 입장했다.

소년들과 코치는 붉은 멧돼지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등장했으며 기자회견 중 축구 시범을 보이며 비교적 밝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소년들과 코치는 동굴 안에 갇혔을 당시 절망적이었던 상황과 구조 작업 과정이 진행됐을 당시의 심경을 고백했다. 아이들은 "절망해서 안된다"고 서로를 다독이며 동굴에서 버텼다고 말했다.

고립됐던 12명의 소년 중 한 명인 아둘 삼온(14)은 두 명의 영국 잠수부에게 발견됐을 당시를 떠올리며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13명 중 영어가 유일하게 가능해 축구팀과 다국적 구조팀에 상황을 설명하며 구조를 도왔던 삼온은 잠수부들과 마주친 순간을 "희망적인 순간"이었다고 묘사하며 "(구조대를 보고) 모두가 행복해했다"고 회상했다.

반면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구조 결정 순서에 대해서 코치는 아이들의 건강상태가 아닌 동굴에서 가장 먼 곳에 사는 아이가 먼저 나가는 방식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로 배 채워

지난달 23일 소년들과 코치는 오후 축구 훈련을 마치고 탐루앙 동굴 탐험에 나섰다. 하지만 소년들이 동굴을 관광하던 중 폭우로 물이 불어나면서 13명은 동굴에 고립되어 연락이 두절됐다.

아이들과 코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역시나 음식이었다. 헌신과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주며 성공적인 구조 작업에 기여한 코치는 당시 동굴 탐험이 한 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고 예상을 해 음식을 전혀 들고 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코치는 다행히 동굴에 들어가기 직전 모두 식사를 한 상태였으나, 고립된 이후에는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고 동굴의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만 마시면서 배를 채웠다고 절박했던 상황을 묘사했다. 

한 소년은 "배가 고파질까 봐 음식에 관한 생각을 아예 안 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코치는 당국이 구조하러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며 순번을 돌아가며 땅굴을 팠다고 전했다. 한 아이도 돌을 이용해 3~4m 깊이의 땅굴을 팠다고 부연했다.

한편 동굴 고립 당시 어려웠던 상황을 이야기하던 중 한 아이가 "집에 못 돌아가면 엄마에게 꾸중을 들을까 봐 무서웠다"는 천진난만한 대답을 해 취재진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비록 동굴에서 물만 마시면서 버텼지만, 구출 당시 아이들과 코치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것으로 밝혀졌다. 구출 후 아이들과 코치는 치앙라이주 북부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 체력을 회복했다. 담당 의료진은 소년들이 구조된 이후 몸무게가 평균 3kg 늘었으며, 생환자 모두 건강한 상태라고 전했다. 

◆ 다시 평범했던 삶으로

태국을 비롯해 미국과 영국, 인도 등 다국적 구조대원과 동굴탐사 전문가들이 참여한 구조 작업과 소년들의 기적적인 생환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태국 정부는 갑작스럽게 쏟아진 관심이 아이들의 정신 건강에 끼칠 안 좋은 영향을 고려해 그간 언론 보도 및 인터뷰를 자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기자회견 역시 구조 작업에 많은 관심과 응원을 보내 준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련됐으며 인터뷰 질문 역시 철저하고 세심한 검토 과정을 거쳐 선별됐다.

태국 당국은 이번 기자회견을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사생활을 존중해 달라고 당부했다. 아이들의 심리치료를 맡았던 한 심리학자도 "우리는 아이들이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 학교에 다니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saewkim91@newspim.com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광복군, 일본군 무장해제 "항복사실 모르느냐?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전의(戰意)가 없는 것을 보이기 위해 기관단총을 모두 어깨에 걸쳤다. 그러고도 만일을 위해서 각각 산개하면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몸을 날렸다. 아. 그때 그 바람 냄새, 그 공기의 열기, 아른대는 포플러의 아지랑이, 그리고는 아무것도 순간적이었지만 보이지 아니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가? 우리 주변엔 돌격 태세에 착검한 일본군이 포위하고 있었다. 워커 구두 밑의 여의도 모래가 발을 구르게 했다. 코끼리 콧대 같은 고무관을 제독총에 연결한 험상궂은 방독면을 뒤집어쓴 일본군이 차차 비행기를 중심으로 원거리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너무나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것이 그리던 조국 땅을 밟고 처음 맞은 분위기였다. 동지들은 눈빛을 무섭게 빛내면서 사주경계를 했다. 그러나 아직 기관단총을 거머쥐지는 아니했다. 여의도의 공기가 움직이지 않는 고체처럼 조여들어 왔다. 뿐만 아니었다. 타고 온 C46형 수송기로부터 한 50여m 떨어진 곳의 격납고 앞에는 실히 1개 중대나 되는 군인들이 일본도를 뽑아 든 한 장교에게 인솔되어 정렬해 있었다. 그 앞에는 고급장교인 듯한 자들이 한 줄 또 섰고, 장군 몇 명도 있는 듯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8월 18일 한낮의 그 뜨거운 여의도 열기가 우리를 더욱 긴장시켰다. 격납고 뒤에까지 무장한 군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중형전차의 기관포도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환호하는 광복군.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비행장 아스팔트 위엔 한여름의 복사열이 그 위기의 긴장처럼 이글대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땀에 젖어 있었다. 기막힌 침묵이 십여 분이나 지났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행동도 취해 오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가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일본군 고급 장교들이 늘어선 쪽으로 한걸음 씩 움직였다. 각자 산개, 조심하라! 누군가가 이렇게 나직하게 말했다. 서해 연안으로 비행기가 고도를 낮출 때 누군가가 유서를 쓰던 일이 이 순간 내 머릿속에서 상기되었다. 일본군 병사들은 우리가 다가서자 의외로 포위망을 풀 듯이 비켜섰다. 우리는 아직 기관단총을 어깨에 멘 그대로였다. 일본군이 길을 열어주자, 그들도 일본군 육군 중장을 선두로 한 장교단이 우리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조선주차군사령관 죠오쯔끼(上月良夫)였다. 쬬오쯔기는 그의 참모장 이하라 소장과 나남 사단장과 참모들을 뒤로 거느렸다. 우리도 좌우로 벌려 섰다. 쬬오쯔기가 「나니시니 이라시따노?(무슨 일로 왔소?)」말문을 열었다. 퍽 야무지게 보였다. 우리는 말 대신 영등포 상공에서 뿌리다 남긴 선전 전단을 내밀어 주었다. 우리의 임무가 일본어와 우리말로 적힌 전단이었다. 거긴 또 우리가 이렇게 들어오게 된 사연도 적혀있었다. 우리는 한 장씩 그 전단을 다른 일본군 장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쬬오쯔끼는 이를 받아 읽고, "일본은 정전만 한 상태이니 일단 돌아갔다가 휴전 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재입국하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위협했다. 자기네 병사들이 꽤 흥분되어 있으니,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그 신변 보호에 안전책임을 지기가 어렵다는 분위기라고 했다. 이에 이범석 장군이 "네 놈들의 천황이 이미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사실을 모르느냐? 이제부터는 동경의 지시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맞섰다. 그러나 쉽사리 양보하지 않았다. 옥신각신 말이 몇 번 건너 왔다 갔다. 갑자기 쬬오쯔끼는 한 일본군 대령에게 일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그는 동경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 마중을 나와 있던 참이란 말을 하고는 물러가 버렸다" 이범석 장군은 일본군 측에 "조선 총독을 만나 담판 짓겠다'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일본군 무장해제 임무를 띠고 국내로 들어 온 '광복군 국내정진군'은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한 채 다음 날 8월 19일 14:30분 여의도 기지를 이륙하여 중국으로 돌아갔다. 광복군은 미군정이 시작되고 나서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조짐이 좋지 않았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5-09-29 08:00
사진
중국 전기차 주행거리 두배 증가 배터리 개발 [베이징=뉴스핌] 조용성 특파원 = 중국이 에너지 밀도를 두 배 증가시킬 수 있는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해 낸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칭화(淸華)대학 화학공학과의 연구팀은 '음이온이 풍부한 용매화 구조 설계'를 개발해 냈으며, 이를 기반으로 불소 함유 폴리에테르 전해질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고 중국 관찰자망이 30일 전했다. 해당 연구 성과는 논문 형식으로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에 등재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폴리에테르 전해질은 고체이며, 연구팀은 해당 전해질을 사용하여 전고체 배터리를 제작했다. 제작된 전고체 배터리는 604Wh/kg의 에너지 밀도를 기록했다. 이는 현재 리튬 이온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가 150~320Wh/kg인 점을 감안하면 에너지 밀도가 두 배 이상 높아진 것이다. 동일한 무게의 배터리이지만 해당 전해질을 사용한 전고체 배터리는 두 배 이상의 전력을 충전할 수 있는 셈이다. 이론적으로 전기차의 1회 충전 주행 거리가 두 배 증가할 수 있게 된다. 현재 500km가량을 주행할 수 있는 전기차가 1000km를 주행할 수 있게 된다. 해당 전고체 배터리는 안전성 테스트도 통과하였다. 못을 박아도 화재와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120도의 높은 온도의 박스 안에 6시간 동안 방치되었지만, 연소나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500회 이상 충방전을 거치면서도 에너지 저장 용량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전고체 배터리가 상용화된다면 많은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해진다. 전기차의 주행 거리는 두 배 증가하며, 드론의 비행 거리도 두 배 증가하게 된다. ESS(에너지저장장치) 역시 부피당 저장 용량을 크게 끌어올리게 되며 ESS 소형화가 가능해진다. 칭화대 연구진이 개발한 전고체 전해질의 도식도 [사진=네이처 캡처] ys1744@newspim.com 2025-09-30 10:35
기사 번역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기사제목
기사가 번역된 내용입니다.
종목 추적기

S&P 500 기업 중 기사 내용이 영향을 줄 종목 추적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