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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내가 바로 패션이고 명품이다, 코코 샤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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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41)

“용모와 복장이 잘 갖추어진 사람은 그 사람의 내면을 보려고 하지만, 용모와 복장이 잘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은 자꾸만 그 사람의 외모만 보려고 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되려면 늘 달라야한다.”
“몸단장을 하지 않고 외출하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예의를 차리지 않는 행동이다. 오늘이 운명의 상대와 만나게 되는 날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 삶을 창조했다. 이전의 삶이 싫었기 때문에...”

코코 샤넬은 전통과 창조정신으로 한 세기를 풍미한 세계 패션계의 전설이다. 그녀의 야망은 자유를 추구하는 여성, 사랑하고 있는 여성, 사업을 하는 여성, 끊임없이 움직이며 관습을 타파하고 틀에 박힌 일들을 무시하는 그런 여성들의 옷을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여성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그녀가 고안한 우아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는 디자인은 여성들로 하여금 종래의 복잡하고 불편한 옷에서 탈피하여 저지 드레스와 슈트, 나팔바지, 단발머리, 트렌치코트, 터틀넥 스웨터, 모조 보석, 리틀 블랙 드레스 등의 간편하고 새로운 혁신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처럼 20세기 여성에게 자유를 선사한 수많은 아이템은 바로 누구보다도 여성을 이해하고 사랑한 코코 샤넬 정신의 산물이다.

코코 샤넬(Coco Chanel, 1883~1971)은 1883년 프랑스 서부에 위치한 소뮈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이었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그녀는 오바진 수녀원에서 7년여 간 생활하며 바느질을 배웠다. 또 여기서 금욕주의와 블랙 앤 화이트(Black & White) 컬러의 수녀복 의상,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등으로부터 디자인의 영감을 얻었다.
성인이 된 샤넬은 수도원을 나와 봉제회사를 다니며 저녁에는 카페에서 가수로 일했다. 당시 그녀가 부른 노래 때문에 ‘코코(Coco)’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다. 또 후원자인 아서 에드워드 카펠의 도움으로 1910년 파리의 패션 거리에 샤넬 모드(Chanel Modes)라는 모자가게를 열었다. 가게 오픈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우연한 기회를 통해 샤넬이 디자인한 모자가 상류층 여성들로부터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13년 샤넬은 모자 디자이너로서 성공한 것을 기반으로 북부 해양 휴양도시인 도빌 지역에 최초의 부티크(Boutique)를 오픈했다. 부티크의 간판에는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이라는 이름이 대문자로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샤넬이 본격적으로 인지도를 얻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터로 나간 남성들을 대신해서 여성들의 노동력이 요구되었다. 이에 여성들은 화려한 장식이 어우러진 기존의 의복 스타일이 아니라 샤넬의 실용적이고 단순한 디자인에 매력을 느꼈다. 샤넬은 남성 속옷에 사용되었던 얇고 가벼운 저지(Jersey) 천을 투피스에 활용해 여성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대외적인 명성을 얻게 된 샤넬은 1918년에 파리 패션의 중심지였던 캉봉가 31번지로 진출했다. 이후 샤넬은 엉덩이 부분 옆선에 주름을 넣어 만든 샤넬 라인 원피스를 비롯해 큰 호주머니를 단 짧은 소매 재킷(Jacket), 길고 따뜻한 머플러(Muffler) 등을 추가로 출시하여 1920년대 자유로운 복장을 원하던 여성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이때부터 그녀는 순조롭게 패션 디자이너로서 성공의 길을 걷는다.
1921년, 세계 패션계에 역사적인 사업이 시작되었다. 바로 샤넬향수 사업이다. 샤넬은 여성복에서 혁신을 이룬 것처럼 향수 이름을 짓는 데서도 기존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개발된 순서에 따라 번호만으로 향수 이름을 붙였다. 그러니까 마릴린 먼로가 자기는 이것만 뿌리고 잔다고 해서 더 유명해진 ‘No.5’ 는 다섯 번째로 개발된 향수이다. 당시는 향수에 ‘봄의 욕망’, ‘저녁의 도취’ 같은 시적인 이름을 주로 붙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도식들을 과감히 깨부수고 이미 파리에서 자신의 의상실이 유명하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향수 이름을 ‘샤넬’이라고 지었다.

샤넬은 사업이 번창하게 되자 명성에 걸맞은 로고를 직접 디자인한다. 하나는 자신의 이름인 영문 CHANEL을 단순한 글자체로 디자인한 것이다. 또 하나는 두 개의 C자가 서로 대칭적으로 놓인 로고다. 가브리엘 샤넬은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던 ‘Coco’라는 별명을 이렇게 활용한 것이다.
이 두 개의 로고는 샤넬이 세계 패션계에 던진 화두와 이념을 잘 드러내 보인다. 먼저 검정색과 흰색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색의 대비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개의 C자가 이루고 있는 완벽한 대칭성이다. 여기에는 여성을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옷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했던 샤넬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녀는 또 1924년에는 모조(模造)소재 액세서리를 출시했다. 처음에는 이 모조품에 대한 비난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보석은 부나 집안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패션을 위한 액세서리여야 한다.”며 자신의 신념을 강조했고, 자신도 모조진주를 보란 듯이 하고 다녔다. 이후 색색의 보석이나 비잔틴 십자가로 장식된 모조 진주목걸이 등은 샤넬 장신구의 고전이 되었고, 대중들로부터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다. 물론 나중에는 고가의 보석으로 만든 진품(眞品) 주얼리 패션 액세서리 컬렉션도 선보였다.
샤넬 디자인의 단순미와 기능성의 극치는 1926년 발표한 ‘리틀 블랙 드레스(little black dress)’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여성의 검정 의상은 상복이나 점원들의 의상으로만 착용되었다. 하지만 샤넬은 산업혁명 이후 남성복에서 일고 있던 검은색의 우아한 미적 가치를 최고급 여성복에 도입하는 획기적인 시도를 하였다. 그런데 이 디자인은 복제가 쉬워, 다양한 가격대에서 그에 맞는 다양한 소재로 생산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디자인 복제의 성행은 오히려 샤넬 디자인의 홍보효과와 함께 오리지널 샤넬 상품의 희소성을 높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향수의 대명사 샤넬 향수 ‘No.5’ <사진=이철환>

샤넬 스타일이 한 세기를 성공적으로 대표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시대의 흐름을 잘 간파하고 이를 자신의 스타일로 끌고 간 그녀의 혁신적인 사고이다. '덜함이 더함이다(Less is More)'라는 이론과 샤넬의 심플한 디자인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소비자들로부터 커다란 호응을 받게 된다. 또한 실용성을 강조한 그녀의 복식철학이 시대적 추세와 합치해 사업이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둘째, 그녀의 진보적 태도이다. 샤넬은 그 당시만 해도 보잘것없던 디자이너라는 지위에 정면 도전한 선구자적 인물이었다. 스스로 모델이 되어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인상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마른 몸매와 짧은 머리 스타일은 1920년대를 풍미한 미성숙한 소년의 모습과 활동적인 여성상을 대표하였다.
샤넬은 항상 자신이 디자인한 의상과 액세서리를 착용한 모습으로 매체와 대중 앞에 등장했다. 이는 샤넬 상품 자체의 홍보뿐 아니라, 샤넬 자신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비결이 되었다. 그녀 자신이 '샤넬의 모델' 이었고 '샤넬의 홍보실장' 이었으며 '걸어 다니는 카탈로그'였다. 그 시대엔 샤넬처럼 적극적인 디자이너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이처럼 샤넬은 디자이너로서 상당한 명성과 부를 거머쥐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의상 철학만큼이나 여자로서의 개인적 삶도 남자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도도하고 당찬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시대를 풍미하던 예술가, 정치가, 지식인, 사회적 명사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때로는 이들을 유혹하여 그들이 지닌 권력과 부귀를 즐기며 화려한 삶을 누렸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녀와 사귄 남자들은 모두 급사하거나 파산했다. 이에 샤넬은 불행한 사자자리의 숙명을 가진 여자라 불리기도 했다. 또한 같이 일하던 다른 디자이너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정신적 후계자라고 칭찬한 이브 생로랑(Yves Saint Laurent)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같은 여성으로서 라이벌이던 엘자와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많은 세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엘자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는 모든 면에서 샤넬과 반대였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던 샤넬과 달리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샤넬이 심플하고 직선적인 라인, 검은색 등 무채색 계열, 실용적인 옷감을 사용한 반면 엘자는 어깨와 가슴을 강조한 디자인, 일러스트와 동물 등 화려한 무늬, 고급스러운 옷감을 사용했다. 엘자는 재킷에는 단추가 있어야 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나비 장식을 달거나 하이힐을 본 뜬 모자를 만들었다. 1934년에는 여성 치마에 최초로 지퍼를 사용하기도 했다.
샤넬과 엘자의 대결은 의상을 넘어 향수, 잡화로 이어졌지만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두 사람은 파리를 떠나게 된다. 그로부터 15년 후 두 사람은 나란히 패션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때 패션계의 제왕 자리를 차지한 것은 샤넬도, 엘자도 아니었다. ‘뉴룩(New Look)’을 내세우며 등장한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갈리게 된다. 엘자는 패션사업을 정리하고 자서전을 냈지만 샤넬은 끝까지 패션사업을 이어나갔다. 샤넬이 패션을 통해 비즈니스의 길을 걸었다면 엘자는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한편, 무섭게 번창하던 샤넬의 사업이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졸지에 문을 닫아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그녀는 사업을 접고 프랑스 남부로 피신했다. 파리가 나치의 손에 넘어간 상황에서 샤넬은 독일군 장교와 교제하였고 나치에 적극 협력했다. 종전 후 그녀의 이러한 행위가 밝혀지면서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54년, 15년간 파리를 떠났던 샤넬이 스위스 망명생활을 접고 71세의 나이로 돌아와 패션계로의 복귀를 꾀했다. 그러나 그녀의 조국 프랑스에서는 그녀를 나치에 혼을 판 매국노라며 혐오했다. 더욱이 패션의 트렌드도 그녀의 전성기와는 달리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당시 여성들은 전쟁 동안 입었던 실용적인 의상에서 벗어나 우아하고 화려한 의상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 이를 간파한 크리스찬 디올은 코르셋과 부풀린 스커트로 허리 라인을 강조한 ‘뉴룩(New Look)’을 출시했고, 이는 패션업계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그래도 샤넬제품은 왕년의 명성이 남아있었기에 대중들로부터 꾸준한 호평을 받았다. 특히 미국에서는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맞물려 여전히 그녀의 패션이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그 결과 1957년 샤넬은 미국 댈러스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에게 수여하는 ‘패션 오스카상(Fashion Oscar)’을 수상했다.

1971년 1월 10일, 거주하던 파리의 리츠 호텔(Ritz Hotel)에서 콜렉션을 준비하던 샤넬은 8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리츠호텔은 샤넬이 머물었던 방을 ‘코코 샤넬 스위트 룸(Coco Chanel Suite)’라고 이름 붙여 그녀를 기리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유해는 고국인 프랑스의 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했고, 어쩔 수 없이 망명생활을 했던 스위스의 로잔에 매장되었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에 협력함으로써 조국을 배신한 행위를 끝내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샤넬의 자부심은 “나는 사람들이 샤넬 모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샤넬은 스타일이다. 모드는 시간이 지나면 유행이 지나간다. 그러나 스타일은 그렇지 않다.”라는 그녀의 말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녀의 디자인 하우스는 1983년 이후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의 지휘 아래 샤넬 본래의 스타일에 새로운 요소를 접목해 가며 끊임없는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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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노, 벼랑에 선 한국축구 구할까 [서울=뉴스핌] 박상욱 기자 = 2026 북중미 월드컵 이후 '난파선'이 된 한국 축구가 로베르토 모레노(48·스페인)에게 반등의 첫 단추를 맡겼다. 대한축구협회는 1일 천안 코리아풋볼파크에서 2026년도 제7차 이사회를 열고 모레노 감독을 포함한 6명의 코칭스태프 선임을 승인했다. 계약기간은 오는 11월 27일까지다. 9월부터 11월까지 6차례 A매치를 지휘한다. 이후 평가를 거쳐 2027년 1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리는 아시안컵까지 지휘봉을 맡을 가능성도 열어뒀다. 이번 선임은 단순한 '임시 감독 카드'로 보기 어렵다. 한국 축구가 모레노에게 기대하는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다. 대표팀 축구가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신호탄을 쏘아 올려야한다. [서울=뉴스핌] 박상욱 기자 = 2021-2022시즌 스페인 그라나다 CF 감독 재임 시절 로베르토 모레노. [사진=게티이미지]2026.09.01 psoq1337@newspim.com 모레노는 전술과 데이터 분석에 강점을 가진 지도자다. FC바르셀로나와 스페인 대표팀에서 루이스 엔리케 감독의 수석코치를 맡았다. 엔리케 사단의 핵심으로 스페인 대표팀과 세계 정상급 클럽의 전술 시스템을 경험했다. 선수 역할 설정과 상대 분석에도 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짧은 기간 선수들을 파악하고 전술적 색깔을 입혀야 하는 임시 감독의 조건과 맞아떨어진다. 코칭스태프도 사실상 '모레노 사단'으로 꾸려졌다. 에두아르도 도캄포 수석코치를 비롯해 하신트 마그리냐, 빅토르 브라보 데 소토 코치가 합류한다. 하비에로 초카로 피지컬 코치와 니코 보쉬 골키퍼 코치까지 모두 스페인 출신이다. 다만 모레노의 감독 경력에는 분명한 약점도 있다. 수석코치로 쌓은 경력에 비해 독립적인 감독으로서의 성과는 미미하다. AS모나코에서는 6개월 만에 지휘봉을 내려놨다. 그라나다에서도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다. 러시아 소치에서는 2부리그 팀의 승격을 이끌었지만 다음 시즌 초반 7경기에서 1승에 그치며 경질됐다. [서울=뉴스핌] 박상욱 기자 = 2021-2022시즌 스페인 그라나다 CF 감독 재임 시절 로베르토 모레노. [사진=게티이미지] 2026.09.01 psoq1337@newspim.com 따라서 모레노에게도 임시 한국 사령탑 자리는 중요한 승부처다. 한국에서 성과를 낸다면 하락세였던 감독 경력을 반전시킬 수 있다. 아시안컵까지 지휘봉을 이어갈 경우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능력을 다시 증명할 기회도 얻는다. 한국 축구 역시 마찬가지다. 모레노의 성공은 곧 대표팀의 재출발을 의미한다. 전술이 정착되고 경기력이 개선되며 젊은 선수들의 경쟁력이 확인된다면 무너진 신뢰를 회복할 최소한의 기반을 만들 수 있다. 모레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6경기 동안 대표팀의 새로운 정체성을 보여줘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결과와 내용이다. 단순히 승수를 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선수 선발의 기준을 세우고 포지션 경쟁을 유도해야 한다. 전술적 일관성을 확보해야 한다. 월드컵에서 드러난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경기장에서 보여줘야 한다. psoq1337@newspim.com 2026-09-01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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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총 10배 증가' 팀 쿡 시대의 종언 이 기사는 8월 31일 오후 4시56분 '해외 주식 투자의 도우미' GAM(Global Asset Management)에 출고된 프리미엄 기사입니다. GAM에서 회원 가입을 하면 9000여 해외 종목의 프리미엄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뉴스핌] 김현영 기자 = 2026년 8월 31일은 팀 쿡이 애플(종목코드: AAPL) 최고경영자(CEO)로서 보내는 마지막 근무일이다. 2011년 스티브 잡스 사망 이후 15년간 애플을 이끌어온 그는 다음 날인 9월 1일부로 이사회 의장으로 물러나고, 오랜 기간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부문을 총괄해온 존 터너스 수석부사장이 새로운 수장 자리에 오른다. 취임 8일 만에 신제품 발표회라는 첫 시험대에 오르는 터너스의 데뷔 무대는 9월 9일로 예정돼 있으며, 이 자리에서 애플의 첫 폴더블 아이폰이 공개될 가능성이 유력하게 점쳐지면서 투자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 시총 10배 키운 팀 쿡, 그가 남긴 유산 쿡이 재임하는 동안 애플의 시가총액은 약 3,500억 달러에서 4조 6000억달러 이상으로 불어났다. 지난 7월에는 잠시 5조 달러 선을 넘기도 했다. 전설적인 창업자의 뒤를 이어받는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부담을 수반하는 과제임에도, 쿡은 재임 기간 주주가치를 10배 넘게 끌어올렸다. 시장에서는 지난 15년간 전 세계에서 주주가치를 견인한 CEO들 가운데서도 가장 성공적인 축에 속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사진=애플] 쿡의 가장 큰 공로로 꼽히는 것은 2007년 처음 출시된 아이폰 사업을 애플의 지속적인 성장을 견인하는 엔진으로 완전히 변모시켰다는 점이다. 아이폰은 2025년 애플 전체 매출 4,161억 달러 가운데 2,095억 달러를 차지하며 단일 사업 부문이 전체 매출의 약 50%를 책임졌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글로벌리서치의 왐시 모한 애널리스트는 아이폰 제품군을 다양한 가격대에 걸쳐 폭넓게 확장시키고, 이와 연동된 공급망의 복잡성을 관리해낸 것이 전적으로 쿡의 공로라고 평가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쿡은 애플뮤직플러스, 애플TV플러스, 애플피트니스플러스, 애플워치, 에어팟 등 아이폰과 연계된 폭넓은 제품·서비스 생태계를 구축했다. 그 결과 서비스 부문은 이제 애플의 두 번째로 큰 사업으로 자리 잡아 지난해 1,091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세 번째로 큰 부문인 웨어러블 기기 역시 356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만약 쿡이 아이폰 프랜차이즈를 서비스 부문으로까지 확장하지 못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규모와 위상의 애플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뒤따른다. 2007년 아이폰을 공개한 故 스티브 잡스 [사진=블룸버그] 재임 기간 내내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각의 비판론자들은 아이폰의 뒤를 이을 만한 후속 제품이 부재하다는 점을 회사의 혁신 동력 약화를 보여주는 신호로 지적해왔다. 이에 대해 모한 애널리스트는 쿡이 물려받은 포트폴리오를 고려할 때 그가 각 사업 부문을 엄청나게 성장시켰으나, 아이폰이 워낙 크고 성공적이다 보니 다른 성과들을 가려버리는 측면이 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실제로 수년 만에 처음 선보인 신규 제품군이었던 비전 프로는 다소 아쉬운 성과에 그쳤지만, 애플은 이 헤드셋을 위해 개발한 일부 기술을 향후 출시할 스마트글라스에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들어서는 생성형 AI(인공지능) 도입이 더디다는 비판에 직면하며 차세대 개선판 시리(Siri)의 출시가 지연된 상태다. 그럼에도 AI 칩과 데이터센터에 수천억 달러를 쏟아붓고 있는 경쟁사들과 달리, 애플은 월가를 뒤흔들고 있는 AI발 밸류에이션 충격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 완벽주의자 터너스는 누구인가 바통을 이어받는 존 터너스는 2001년 애플 제품 디자인팀의 일원으로 입사한 뒤 2013년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부문 부사장으로 승진했고, 2021년에는 수석부사장 자리에 올랐다.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으며 애플 입사 전에는 버추얼 리서치 시스템스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다. 지난 3월 맥북 네오 공개 행사 등 주요 제품 발표 무대에 여러 차례 등장하며 존재감을 넓혀왔지만, 최근 몇 년간 회사를 유심히 지켜본 이들이 아니고서는 여전히 대중에게는 낯선 인물이라는 평가가 많다. 애플 팀 쿡 최고경영자(CEO, 좌)와 차기 CEO로 취임 예정인 존 터너스 [사진=블룸버그] 터너스는 애플이 추구하는 완벽주의적 성향을 그대로 체현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2024년 펜실베이니아대 공대 졸업식 축사에서, 자신이 맡았던 첫 애플 제품인 애플 시네마 디스플레이의 후면 나사 홈 개수를 두고 협력업체와 벌였던 실랑이를 소개한 바 있다. 협력업체가 제시한 나사는 홈이 35개였지만 터너스는 애플이 원하는 25개를 끝내 고수했다는 일화로, 사소해 보이는 부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품을 대하는 자신의 원칙이라는 취지였다. 애플 측은 맥 라인업을 역대 최고 인기 제품군으로 끌어올리고 아이폰17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선보였으며 에어팟을 개선하는 데 터너스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러 제품에 사용되는 재활용 알루미늄 합금 개발을 주도했고, 애플워치 울트라3에 적용된 3D 프린팅 티타늄 소재 작업에도 관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이폰 17 프로 [사진=블룸버그] 지난 4월 발표된 이번 경영권 승계는 애플이 기기 사업이라는 본업에 다시 힘을 싣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공급망과 영업, 재무에 밝았던 쿡과 달리 터너스는 하드웨어 엔지니어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가 외부 영입 인사가 아니라 회사 내부를 25년 가까이 깊이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은 경영권 교체기에 흔히 발생하는 운영·전략적 실수의 위험을 낮춰주는 요인으로 꼽힌다. 다만 그만큼 더딘 전환기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터너스는 AI가 촉발한 기술업계의 대격변 한복판에서 애플을 이끌게 됐다. 아이폰을 뒤이을 차세대 성장동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과제도 안고 있다. 스마트글라스나 AI 핀 등 AI 기반 신제품에 사활을 건 경쟁사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애플 역시 소비자 전자업계에서의 지배력을 이어가려면 이 분야에서 자체적인 답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다. 이와 함께 투자자들은 정교한 가격 전략과 흠잡을 데 없는 실행력, 실질적인 파급력을 갖춘 제품 로드맵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 9월 9일 데뷔 무대, 관전 포인트는 '폴더블 아이폰' 터너스 신임 CEO에게 주어진 첫 시험대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찾아온다. 애플은 9월 9일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 애플파크 내 스티브 잡스 극장에서 신제품 발표 행사를 연다. 이미 "서프라이즈 앤드 샤인(Surprise and Shine)"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눈길을 끌 만한 제품 공개를 예고한 상태다. 애플은 구체적인 제품 라인업을 아직 밝히지 않았지만, 신형 아이폰과 업그레이드된 애플워치는 물론 스마트홈 시장을 겨냥한 여러 제품을 포함해 최대 8종에 달하는 기기가 공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애플이 8월 26일(현지시간) 내달 9일 행사 계획을 발표했다.[사진=애플 웹사이트] 가장 유력한 라인업은 아이폰18 프로와 아이폰18 프로맥스를 포함한 아이폰18 시리즈다. 더 낮은 발열과 긴 사용 시간을 구현할 것으로 기대되는 신형 2나노미터(nm) A20 프로 칩과 배터리 효율 개선·프라이버시 강화·혼잡한 데이터 네트워크 환경에서의 성능 향상을 가능케 할 C2 칩이 함께 탑재될 전망이다. 더 빠른 칩과 개선된 배터리, 카메라 성능이 적용되며 최소한 대형 모델에는 기계식 조리개가 들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아이폰 에어 2세대와 일반형 아이폰18은 이번 행사에서 빠질 것으로 보인다. 애플이 연중 판매를 고르게 분산하기 위해 이들 제품과 보급형 아이폰18e, 신형 맥, 아이패드의 출시를 내년 봄으로 미룰 것이라는 관측이다. 시장의 진짜 관심은 애플의 첫 폴더블 스마트폰에 쏠려 있다. '아이폰 폴드' 혹은 '아이폰 울트라'로 불릴 가능성이 있는 이 제품이 현실화된다면, 아이폰X(아이폰 텐)과 3D 안면인식 도입 이후 최대 변화로 꼽힐 만한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터너스가 이 제품 개발을 직접 주도해왔으며, 그의 취임 시점 자체가 출시에 맞춰졌다는 해석도 나온다. 접었을 때는 여권 크기의 일반 스마트폰처럼 작동하다가 펼치면 책처럼 바깥쪽으로 열리며 태블릿 크기의 화면이 드러나는 구조로, 일반 스마트폰처럼 쓸 수 있는 5.3인치 외부 화면과 펼치면 나타나는 7.8인치 내부 화면 등 두 개의 화면을 갖출 것으로 예상된다. 일부 유출 정보에 따르면 페이스 ID 대신 터치 ID를 탑재하고, 멀티태스킹에 최적화된 초박형 디자인으로 데뷔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가격은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여러 매체 보도와 시장조사업체 IDC의 나빌라 포팔 수석 리서치 디렉터에 따르면 예상 소비자가격은 2,000~2,500달러 수준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포팔 디렉터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이 제품이 상당한 성공을 거둘 것으로 내다봤는데, 최상위층 소비자를 겨냥한 제품인 만큼 이들이 구매를 위해 줄을 설 것이라는 설명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이 프리미엄 폴더블 기기가 판매가를 끌어올리는 동시에 애플에 새로운 마진 성장 동력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IDC는 애플이 출시 첫해에만 1,000만 대 이상을 출하하며 침체가 예상되던 폴더블 시장 전체를 구해낼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힘입어 올해 폴더블 부문이 12.6% 성장하고 내년에는 성장률이 18%로 가속화될 것으로 IDC는 전망했으며, 2027년까지 애플이 전 세계 폴더블폰 출하량의 40%, 1,700만 대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②편에서 계속됨 kimhyun01@newspim.com 2026-09-0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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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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