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강필성 기자] 지난해 11월 4일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은 경인 지역 점포에서 근무하는 임직원 30여명과 함께 부산을 찾았다. 사업장 점검이 아니라 직원들과 소통하겠다는 ‘주니어보드’를 위한 방문이었다.
그는 직원과 직접 소통하기 위해 2003년부터 ‘주니어보드’라는 임직원 식사 행사를 만들었지만 지방에서 열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특히 정 회장은 작정을 한듯 간부 중심의 식사 자리에서 “부산점 직원이 다 고생하는데, 전 직원을 다 부르자”고 제안했다. 별안간 회식 규모는 몇 배로 커졌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일러스트=송유미> |
이 자리에서 정 회장은 직원들을 호명하고 일일이 악수를 하며 “실적에 연연하지 말고 자부심을 갖고 업무에 임해달라. 나를 믿고 회사를 믿어달라. 여러분이 다니고 싶은 직장을 만들겠다”고 격려했다.
사실 현대백화점 부산점은 신세계 센텀시티점, 롯데백화점 부산점에 밀려 부진을 면치 못하는 곳이다. 때문에 임직원들이 느끼는 실적 부담과 압박도 결코 적지 않았다. 정 회장의 방문과 격려가 임직원들에게 큰 의미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현대백화점 부산점의 한 직원은 “입사하고 회장님을 만날 기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직접 격려까지 해주니 감동을 받았다”고 소회를 전했다.
이 단적인 일화는 정 회장의 리더십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재계에서 가장 젊은 오너에 속하면서도 결코 오만하거나 조급하지 않다.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정’이 정 회장의 경영에서 가장 중심에 놓여있다.
◆ 30대에 회장이 된 젊은 오너
정 회장은 사실 재계에서 가장 젊은 오너로 꼽히는 인사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72년생으로 올해 나이가 42세에 불과하다. 재계 오너 중에서는 최연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현대백화점 회장으로 취임했을 때는 더 했다. 그가 부회장에서 회장이 된 것은 2007년으로 그의 나이 불과 35세일 때다.
이 때문인지 정 회장을 공식석상에서 보기는 쉽지 않다. 그가 취임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기자간담회에 참여하지 않았을 정도. 혹자는 그를 두고 ‘은둔형 경영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삼가는 것은 공식 외부 활동일 뿐, 내부에서는 여느 오너 못지않은 활발한 활동을 하고있다.
‘주니어보드’가 그 대표적인 산물이다. 정 회장이 2003년 도입한 이 제도는 매년 40명씩 부장에서 사원급까지 다양한 직급의 직원들을 선발해 매월 한번씩 애로사항, 건의사항을 중심으로 격의 없는 소통 시간을 갖는 자리다.
특히 정 회장은 회식 중 직원 개인 접시에 음식을 일일이 덜어주고 항상 직원의 말을 듣고 난 다음 의사를 전달하는 세심한 배려로도 정평이 나 있다.
실제 정 회장의 ‘따뜻한 리더십’은 제도적으로도 구체화 되고 있다. 7시 이후 PC가 강제적으로 꺼지는 전사적인 야근 줄이기 운동에 이어 지난달부터는 현대아산병원과 연계해 임직원 ‘스트레스 관리 프로그램’을 시행 중이다.
지난해에는 직원이 사내 게시판에 고충을 털어 놓으면 사장이 간식을 들고 찾아가 대화하는 ‘사장님이 쏜다’라는 제도도 선보였다.
이런 ‘따뜻한 리더십’은 현재로서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보여주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정 회장 취임 이후 급격하게 성장하는 중이다.
2007년 정 회장 취임 당시 자산총액 4조9390억원, 24개 계열사를 보유했던 현대백화점 그룹은 2012년 기준 자산총액 11조5170억원 35개 계열사로 변모했다.
특히 이런 성장을 위한 변화는 최근들어 더 가속도가 붙는 모양새다. 2012년 패션업체 한섬, 지난해 가구업체 리바트를 인수한 현대백화점그룹은 올해 아울렛 사업에 신규 진출하고 있다.
◆ 내부에선 세대교체 한창
현대백화점그룹은 내부적으로도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다. 정 회장 체제 7년차를 맞이하면서 현대백화점 내 세대교체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것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의 2인자로 꼽혔던 경청호 현대백화점 부회장은 지난 2월 상근고문으로 물러났다. 경 부회장은 정 회장의 취임과 함께 2007년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한 이후 약 7년간 정 회장을 보좌해온 최측근 인사로 꼽힌다.
더불어 현대백화점그룹 사장단에서 가장 정 회장의 신뢰를 받아왔던 하병호 현대백화점 전 사장도 올 초 대표이사를 사임하고 상근고문으로 물러났다. 그는 정 회장의 취임과 함께 현대홈쇼핑 대표이사 부사장을 맡다가 이듬해인 2008년부터 현대백화점 대표이사를 맡아왔다.
이와 함께 새로운 체제 구축도 진행 중이다.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올해 기획조정본부장에서 대표이사로 선임된 이동호 현대백화점 사장이다. 그는 현재 현대백화점 내에서 정 회장에게 가장 많은 신뢰를 받는 인물로 꼽힌다.
이동호 사장은 현재 현대백화점 대표이사 외에도 한무쇼핑, 현대쇼핑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고 한섬, 현대리바트, 현대그린푸드, 현대A&I, 현대LED, 금강A&D, 한국도심공항에서 이사를 맡는 등 주요 계열사의 요직을 겸직 중이다. 현대백화점 내에 겸직이 이처럼 다채로운 것은 이 사장이 유일하다.
현대백화점의 각자대표인 김영태 사장은 한무쇼핑과 현대쇼핑의 이사만을 겸직하고 있다.
이 세대교체의 의미는 각별하다. 정 회장이 지금까지 부친인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백화점 사업을 해왔다면 이제는 정 회장이 직접 발탁하고 검증한 인사들이 활약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 막강한 인맥풀 ‘눈길’
이 과정에서 정 회장의 인맥이 어떤 역할을 할지도 관심사다.
정 회장의 혈연·학연 등으로 묶인 인맥은 젊은 오너치고는 제법 걸출하다.
여기에는 범 현대가의 특징인 친인척끼리의 끈끈한 유대도 한 몫 했다. 한때 현대상선을 두고 일부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고(故) 정주영 창업주나 그의 부인 고(故) 변중석 여사의 기일은 물론이고 주요 현안이 있을 때마다 범 현대가가 회동하는 것은 제법 유명한 이야기다.
최근 몇 년간 범 현대가는 이전 외환위기 등의 과정에서 매각된 현대 옛 계열사를 다시 인수하는데 조직적인 실행력을 보이기도 했다.
주목할 점은 이 범 현대가가 재계에서 거대한 인맥풀의 중추라는 점이다.
정주영 창업주는 무려 8명의 아들을 뒀고 동생들이 낳은 조카들까지 합치면 현대가 2세는 남성만 따져도 19명에 달한다. 3세로 내려간다면 직계만 따지더라도 20명이 훌쩍 넘는다. 방계를 포함하면 세기도 쉽지 않을 정도다.
이들은 현재 곳곳에서 맹활약 중이다.
재계 서열 2위의 정몽구 현대차 회장을 비롯해 정치권에는 정몽준 전 국회의원, 금융계에는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과 정몽일 현대기업금융 회장, 보험업계에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 IT업계 정대선 현대BS&C 사장 등 정·재계 곳곳에 현대가가 포진하고 있다.
단일 영향력을 꼽자면 범 현대가의 인맥은 글로벌 시장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다. 특히 범 현대가 3세 답게 3세간의 친분도 두텁다.
일례로 정 회장이 현대백화점 양궁 실업팀 창단을 하게 된 것은 두 살 위의 사촌 형이자 대한양궁협회 회장인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의 권유가 주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더불어 정 회장의 경복고 출신의 인맥도 막강하다. 경복고를 나온 동문으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등이 꼽힌다. 특히 정 회장은 같은 유통업에 종사하는 라이벌이자 4년 선배인 정용진 부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외에도 정 회장은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의 남편인 문성욱 이마트 부사장과 절친한 사이다.
경쟁사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도 간혹 만남을 갖는 사이로 전해진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 1972년 서울 출생
- 1991년 경복고 졸업
- 1997년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 1999년 마국 하버드대 스페셜스튜던트 과정 이수
- 2001년 현대백화점 기획실장 이사
- 2002년 현대백화점 기획·관리담당 부사장
- 2003년 현대백화점그룹 총괄 부회장
- 2006년 현대백화점그룹 부회장
- 2007년 12월~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뉴스핌 Newspim] 강필성 기자 (feel@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