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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문의 風流 여행기] 강진 청자와 여수의 봄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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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서 만난 옹기와 청자

청산도에서의 신명을 가득 안고 옹기 마을인 강진군 칠량면에 들어섰다. 옹기는 사람을 편하게 해 준다. 생긴 모양새가 만만해서 좋다. 특별히 잘 생긴 게 아니다 보니 데리고 놀고 싶은 맘마저 든다. 생김에서 우러나는 투박한 인품은 아무리 자주 봐도 물리지 않는 곰삭은 맛을 준다.

옹기 관련 용어도 문학적이어서 좋다. 한 말 짜리는 ‘방퉁이’, 두 말 짜리는 ‘댕구’, 서 말 짜리는 ‘조댕이’, 닷 말 짜리는 ‘중독’, 열 말 짜리는 ‘대독’, 옹기의 원재료 상태는 ‘질’, 질을 다듬은 것은 ‘타래미’, 타래미 중에서 대독을 만드는 것은 ‘채바퀴 타래미’라 한다. 옹기관련 말에서 질퍽한 남도를 느낀다.

장인(匠人)이 정성 껏 빗어 만든 갓 태어난 옹기를 맨손으로 만져보니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온 몸으로 수백 년 싸여 온 문화의 숨결을 둘 숨 날 숨으로 옹기 속에 박고 떠날 즘 장인께서 버스 출발 지점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 배웅 해 주었다. 흙을 만지는 사람은 어질다는 겪음 배움에서 사람 냄새를 또 맡았다.

청자박물관을 찾았다. 청자의 생산 기법 중 하나인 양각과 음각, 그리고 상감에서 그 시대 최고의 신기술을 보았다. 요즘말로 말하자면 세계 최고의 소프트 웨어가 장착된 스마트 폰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카카오톡을 하는 기분이었다.

청자는 옹기와 달리 고매했다. 추상같은 율이 서있는 선승 같으면서도 대청 마루를 깨끗하게 걸레질 한 맵시 있는 여인 같기도 했다. 청자속엔 풍류가 있었다. 매란국죽(梅蘭菊竹)은 물론이고 시서화가무악(詩書畵歌舞樂)이 비취빛 자기속에서 시나위 처럼 울려 나왔다. 박물관을 나서자 강진만 포구 위로 저녁놀이 붉게 내려 앉고 있었다.

구례, 순천, 여수의 봄 빛

짧고 긴 여행이었다. 항상 마음속엔 있으면서도 주변에 끄달리는 생활을 하다 보니 동경만 해오던 구례, 순천, 여수 지역 여행을 용기 내 다녀왔다. 춘향전 변 사또 부임행차 대목처럼 서울-천안-전주-남원-구례 산동 산수유 마을에 도착하니 온 천지가 노랗게 색칠돼 있었다.
 
유홍준 교수는 남도의 빛깔을 청보리 색이라고 표현했지만 산수유 마을에 내리고 있는 남도의 봄 색깔은 노랬다. 지리산 노고단을 등지고 앉아있는 마을은 스위스 융풀라워 가는 길목에 있는 전원 마을 보다 더 자연스럽고 더 곡선적이었다. 목가적 풍경이 엄마 품처럼 안아주었다. 그러나 흠도 있었다. 공무원 특유의 시멘트같이 딱딱한 머리로 짜내 만든 철골 산수유 탑이 그 것이다. 철 탑은 한복입고 철모 쓴 시골뜨기 이등병 같았다. 보길도 동천석재 옆에 현대식 모정을 세운 완도 섬 지방 관리들과 어쩜 그렇게 닮았는지 슬픈 마음이 밀려왔다.
 
늦은 오후 화엄사에 도착했다. 불자인 내 입장에서 보았을 때도 눈살이 찌푸려 졌다. 뭔 놈의 절이 그렇게 화려하고 외국말로 덧칠을 해 놓았는지 빨갛게 입술을 칠하고 손님을 유혹하는 노류장화 같았다. 마음을 내려 놓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거칠게 흔들렸다. ‘차라리 오지 말 걸.’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화엄사에 대한 씁쓸한 맘을 뒤로 하고 구례 동편제 전수관을 찾았다. 구례는 판소리 동편제의 본향이다. 근대 5명 창 중 한분인 송만갑 선생 생가 앞에 핀 진달래와 벚꽃이 광목을 배에 두르고 소리를 하면 광목이 터졌다는 송만갑 선생의 통음에 떨고 있었다. 잰걸음으로 운조루 장독대와 부엌살림을 돌아 본 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의 하나라는 섬진강 길 따라 피아골 연곡사를 찾았다.

이번 여행의 눈 대목 중 하나가 연곡사였다. 그 이유는 故 박경리 선생이 소설 토지를 쓰면서, 윤씨 마님이 동학접주 김개주에게 겁탈 당하고, 윤씨 마님의 손녀 최서희 남편 김길상이 행자 생활을 이 곳 연곡사에서 한 것으로 실타래 같은 이야기를 풀어갔기 때문이다. 연곡사는 선방같은 절이었다. 인적 드문 대웅전 앞엔 벚꽃과 홍매화, 산수유, 목련이 지천으로 핀 채 말없이 불법을 전하고 있었다. 종로 3가 부침개집 막걸리 같은 편함이 속뜰을 묵연하게 만들어 주었다.

지천명 너머 이순을 바라보는 스님으로부터 심우도를 설명 듣던 중 스님께서 "절에 왔으면 맘을 쉬어야 하는 데, 대웅전 한 번 휘익 돌아보곤 채 3분도 안 돼 떠나는 관광객을 보면 안쓰럽습니다." 라면서 하룻밤 묵어 갈 것을 권했으나, 나 역시 맘을 쉬지 못하고 총총히 연곡사를 떠났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여행 둘째 날 선암사를 찾았다. 선암사는 가장 한국적인 절이다. 토담, 골기와, 처마 밑 풍경, 몇 백 년 된 홍매화 군락, 등 굽은 소나무 등이 스스로 그렇게 자리 잡고 앉아 제 각각의 향을 뿜어냈다. 절 해우소에 걸려 있는 정호승의 시 외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절이었다.

-  선  암  사  -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구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 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불일암
다음 일정은 송광사였다. 법정 스님이 상주하셨던 불일암을 먼저 올랐다. 삼나무와 대숲에 난 오솔길을 따라 말없이 올랐다. 법정스님이 손수 건립했다는 불임암 뜨락엔 봄볕이 잔잔하게 쏟아져 내렸다. 생전에 그렇게 좋아하셨다는 후박나무 밑엔 스님의 유골이 숨 쉬고 있었다. 스님이 만드신 빠삐용 의자 위 수첩에 방문 소감을 적었다. 앞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인연의 업이 화두처럼 날이 서 있었다.
 
송광사 마당엔 서릿발 같은 지계(持戒 : 수행자가 마땅이 지켜야 할 언행)의 기운이 넘쳐났다. 대웅전 뒤뜰 꽃들에게서도 머리에 기름 바르고 2 : 8 가르마를 탄 정보기관원 같은 칼칼한 맛이 배어나왔다. 부처님 전에 삼배하고 앉아 금강경을 독송하니 맘이 심복(甚福 : 부처님 사랑으로 행복해 지는 것)됐다.
 
벌교읍은 송광사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 배경 무대이기도 한 보성여관 자리와 홍교를 찾았다. 삐걱대는 일본식 건물인 보성여관 계단에 앉아 하대치, 소화, 염상진, 염상구 등 시대의 생채기들이 살점을 뜯어내며 피를 흘리고 있었다. 빨갱이 형 염상진을 잡기 위해 애쓰던 우익 동생 염상구가 형 염상진의 시체를 부여 잡은 채 "살아서나 빨갱이 제... 죽어서도 빨갱잉가?" 하며 통곡하는 모습이 쾌~앵하니 다가왔다.
 
저녁 무렵 낙안읍성을 찾았다. 동헌 마당엔 ‘관리가 백성의 볼기에 곤장치는’ 밀랍인형이 설치 돼 있었다. 이를 본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는 백성들을 핍박한 역사로 흘러왔다’고 오해하기에 충분했다. 진저리가 처졌다. 공무원들의 머리는 왜 이렇게 유연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여행 마지막 날 아침, 경관 좋기로 소문난 여수시 돌산읍 향일암을 찾았다. 관세음보살님께 108배를 올렸다. 다라니경을 독송하며 맘속의 소원을 빌었다. 목탁소리가 때 낀 맘을 씻어 주었다. 점심 때가 돼 암자에서 내려왔다. 쌉쏘름한 돌산 갓김치에 하얀 쌀밥을 먹었다. 오장육부에 꽃잎이 분분히 날렸다. 남도의 봄이 깊어 갔다.

변상문 전통문화연구소장 (02-794-8838, sm29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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