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KYD 디데이
정치 국회·정당

속보

더보기

[KYD 폴리티션 스토리] (상) 박지원 "지금 82세지만 나는 여전히 꿈을 향해 간다"

기사입력 : 2024년12월03일 07:21

최종수정 : 2025년01월07일 15:24

"어려웠던 김대중 선생 만나자마자 큰 절"
청년에게도 조언 "현실 어려워도 노력하면 잘 될 것"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정치인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는 뉴스핌TV '폴리티션 스토리'에 출연해 어머니와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잊지 못할 인연들과 자신의 정치 철학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박 의원은 당시 사형 선고 후 미국으로 망명한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뉴욕한인회장이었던 박 의원은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 씨와 친분이 있을 정도로 집권 여당과도 인연이 있었지만, 김 전 대통령을 선택했다.

박 의원은 뉴스핌TV 폴리티션스토리에서 미국에서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내가 잘못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김대중 선생에게 큰 절을 올렸다"며 "선생님, 제가 잘못 산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민주화를 위해서 벽돌 한 장이라도 놓는 그런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고 했다고 소개했다.

이후 박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오랜 기간 측근으로서 곁을 지켰다. 김 전 대통령의 용인술은 위기 때 측근을 불러 해결하고, 위기가 지나가면 측근들을 멀리하는 것이었지만, 박 의원은 한 번도 곁을 떠난 적이 없다.

박 의원은 그 비결에 대해 '모든 일에 영혼을 바쳐서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모든 일에 자기의 영혼을 바쳐서 해야 상대방이 미동을 하지 내가 쇼를 하면 이미 상대방은 안다. 그래서 혼을 바쳐서 해야 한다"라며 "그런 것을 중시했다"고 설명했다.

박 의원은 이날 현재 어려운 청년들에게도 당부와 격려의 말을 전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긍정적으로 생각한 결과가 이뤄졌다"며 "사회적인 성공과 실패의 개념이 아니라 내가 성취하고 싶은 것들로 가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82세이지만 저는 한번도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루에 2시간씩 걸으면서 그 꿈을 향해 가고 있다"며 "청년들이 궁색하게 생각하지 말고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잘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042년 6월 5일 전라남도 진도 출생으로 광주 교육대학과 단국대학교 상학을 졸업했다. 14대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시작해 국민회의 대변인, 국민회의 총재특별보좌역, 김대중 대통령당선자 대변인, 대통령 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제2대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 실장 등 김대중 정부에서 화려한 이력을 자랑했다.

이후에 18대·19대·20대 국회의원을 지낸 후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정보원 원장을 역임하고 다시 전남 해남군완도군진도군에서 22대 국회의원으로 돌아왔다. 현재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2024.12.02 dedanhi@newspim.com

 다음은 박 의원과의 폴리티션 스토리 인터뷰 전문이다.

-(채송무 정치부 기자, 이하 채 기자)정치인의 미래와 과거, 현재를 전부 아우르는 폴리티션스토리 진행을 맡은 뉴스핌 정치부의 채송무 기자입니다. 옆에는 함께 진행을 맡아주실 스웨덴 린네대의 최연혁 교수님 모셨습니다. 오늘은 박지원 의원님 모시고 정치 역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의원님은 오랜 기간 민주당 내에서 전략적 사고와 성실함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당 원내대표를 하실 때 여당에서는 굉장히 괴로워하면서도 타협할 수 있는 원내대표라고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같은 성실함이나 전략적 사고는 어린 시절부터 있어왔을 것인데 어떤 소년이셨습니까.

▲(박지원 의원, 이하 박 의원) 그렇게 칭찬을 받으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저희 아버님이 독립지사니까 그런 피가 있겠죠. 그런데 진도에서 저희 집안이 늘 국회의원을 나가고 도의을 나가니까 주위에서 그런 것을 보고 자라 '국회의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 김영삼 원내총무가 펄펄 날라 다녔잖아요. 그래서 '나는 야당 총무를 꼭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고등학교 때 별명이 야당 총무였습니다.

-(최연혁 교수, 이하 최 교수) 진도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박 의원) 진도는 유배지로 장흥군과 진도군이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저희도 유배된 이들의 후손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학자들이 많이 진도로 유배 와서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한국화, 서예, 특히 국악에 대해 분위기가 아주 좋은, 가난하면서도 평화로운 그런 섬이죠.

-(최 교수) 그 당시 정치적인 현안은 무엇이었을까요.

▲(박 의원) 저희 어머님이 말씀하시기를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으로 진도를 오셨대요. 어머님이 여성 대표로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를 했다고. 어렸을 때 그것이 기억나요. "손을 명주로 싸가지고 있어야 되겠다"고. 대통령과 악수했다고. 대통령이 상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치적 이념은 없었어요. 단 우리 집안에서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인척, 형님, 아저씨들이 다 민주당을 했어요. 자유당을 하지 않고. 그래서 늘 저항정신은 갖고 있었지만, 제가 어려서 민주당이 무엇인지, 자유당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조건 국회의원을 한번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갖고 나갔죠.

-(채 기자) 아버님이 독립투사셨던 집안 분위기도 있지만, 가장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어머니셨을 것 같은데, 어머니에 대한 가장 큰 기억은 무엇입니까.

▲(박 의원) 어머니는 저에게 모든 것이었죠. 누구나 그렇잖아요. 자기 어머니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우리 집이 가난하지도 않고 부자지도 않고. 그냥 밥술깨나 먹는 집안으로 정미소를 했는데 베푸는, 나누는 삶을 살도록 말씀을 하셨고 실제로 어머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남에게 충분하게 주는 사람이 돼라"고 했던 말씀이 기억으로 남아있고 그것이 좋은 교훈을 준 기억이 있어요. 정치를 하면 우리 국민들이 평화롭고 잘 사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엊그제 대전 독립지사 묘역에서 아버지, 어머니께 인사 드리고 조카들, 손주들이 모인 자리에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 갖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한 분이기 때문에 혼자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나누어 갖으려는 생각을 가져라"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최 의원) 의원님을 보면 인연이라는 것은 선택과 자신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한국의 진도에 있다가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과정을 말해주시죠

▲(박 의원) 제가 LG에 들어갔었어요. 그런데 저희 큰 형님이 회사에서 미국으로 가셨어요. 그래서 미국에 가서 형님 회사에 잠시 있다가 나와서 독립을 해가지고 저는 진짜 모든 일을 열심히 해요. 치열하게, 그래서 어느 정도 성공을 했죠. 그러니까 "너는 장사할 사람이 아니다. 정치를 해라"고 해요. 저는 긍정적·진보적·진취적으로 생각한 결과가 이뤄졌다고 생각해요. 이룬 것이 사회적으로 성공, 실패 이런 개념이 아니라 내가 성취하고 싶은 것들로 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82세이지만 한 번도 제가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을 하지 않고 하루에 2시간씩 걸으면서 그 꿈을 향해 가고 있어요. 청년들 좀 궁색하게 생각 하지 말고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잘 되는 것 아니에요?

-(채 기자) 의원님의 정치 역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김대중 대통령입니다. 미국에 가서 성공한 사업가가 돼 당시 민정당 쪽과도 친했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탄압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김대중 대통령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박 의원) 제가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씨와 아주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미주지역 총연합회장을 하고 있는데 전경환 씨가 왔더라고요. 그 분의 형님이 그렇게 높은 사람인지는 처음에는 몰랐죠. 전두환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하는데 뉴욕 한인회장 자격으로 환영위원장을 했어요. 이후 전경환 씨가 굉장히 잘해주려고 했어요. 한국에서 큰 이권을 주어서 제가 나왔어요. 나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제가 언젠가는 정치를 하고 싶은데 내가 이것을 하면 족쇄가 될 것 같아요. 독재자에게 이득을 보게 되면 족쇄가 되지 않냐, 그래서 큰 형님에게 전화를 했어요. "형님, 아무래도 내가 이것을 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으로 족쇄가 될 것 같습니다" 했더니 큰 형님도 "하지 마라" 그래서 그 다음날 안했어요.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계시다가 석방이 됐잖아요. 그래서 미국으로 오신 거에요. 저만 안 갔죠. 왜냐면 전두환 쪽과 관계가 있으니까. 그런데 도저히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해 친구의 소개로 김대중 대통령을 찾아갔어요. 제가 찾아간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일체 집을 비우고 혼자 계시더라고요. '내가 잘못 살았구나'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아계신 김대중 선생께 큰 절을 올렸어요.

울면서 "선생님, 제가 잘못 산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민주화를 위해서 벽돌 한 장이라도 놓는 그런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했더니 저보고 일어서라고 하더라고요. "박지원 회장이 전두환 대통령 환영식을 했다고 해서 부담을 갖지 마라. 당연히 전두환 대통령을 환영한 것이 아니라 미주지역 총연합회 회장으로 환영한 것이니까 괜찮다" 그리고 저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이 "박 회장은 이미 대한민국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박 회장이 수입해 오는 한국 물품 때문에 한국 노동자들이 고용돼서 소득을 올리고, 우리 경제에 도움을 주고 있지 않나"라면서 "나를 좀 도와줘라".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밀사 역할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김 대통령은 편지가 다 검열되거든요. 저한테 써주면 제가 가지고 가서 한국에서 나눠드리고 답장 받아오고. 당시에는 김대중 선생이 정치를 한다, 앞으로 재기해서 대통령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때에요. 그런 인연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모시게 됐습니다.

-(채 기자) 이후에도 대통령 대선 패배와 정계 은퇴, 그리고 복귀해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오랜 기간을 함께 하셨고, 김대중 정부의 문화관광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 등 실세 역할을 하셨습니다. 또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는데, 김대중 정부를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박 의원) 먼저 13대 국회 때 김대중 총재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비례대표를 해라' 당시에는 당에 공식적으로 돈을 내던 세상입니다. '얼마를 갖다가 총무원장을 하시던 최영근 의원. 울산 국회의원을 했었던 그 분에게 드려라' 했는데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미국 동부고, 서부도 있으니까 이런 것으로 해서 밀려서 안됐어요. 저는 돌아가는데 김대중 총재님이 굉장히 아쉬워하셨어요. 이후 제가 김대중 총재님이 만들었던 미국 인권문제연구소를 이영작 박사, 유종근 박사하고 같이 해왔었어요. 그러다가 14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됐어요.

선거 끝나고 미국 집에 가 있는데 (김 전 대통령이) 전화를 주셨더라고요. 전화를 주셔서 '수석부대변인을 맡아라'. 이때는 이기택 총재가 통합을 해서 이기택 총재의 꼬마 민주당 분들은 국민을 상대하는 원내대표, 대변인을 맡고, 소위 김대중계, 동교동계는 사무총장, 정책위의장을 맡았어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그때 권노갑·김옥두, 동교동 선배들이 제가 좀 인상이 좋았나봐요. 그래서 '인상이 좋은 박지원이 옆에서 모시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해서 수석부대변인을 맡았는데, 이기택 총재 계열의 장석화 의원이 대변인, 제가 수석부대변인. 물론 장석화 의원은 재선 의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뉴스는 김대중 총재에게서 나오잖아요. 이기택 총재는 별로 말씀을 안하시니까. 그러다 보니 사실상 제가 대변인을 했어요. 매일 새벽 6시에 가서 대통령님과 이야기를 했어요.

사실 민주당은 김대중 후보가 낙선을 하더라도 실망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또 4년 있다가 김대중이 있다. 그러니까 뭉치자. 싸우자, 이기자. 이 생각을 갖고 했죠. 마지막 떨어졌을 때는 영국으로 가셨지만 소위 강창성, 문희상, 박지원을 이기택 총재에게 보냈어요. 저는 거기서도 대변인을 했는데,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 민주당은, 동교동은, 호남은 '우리에게는 대통령 후보 김대중이 있다. 그래서 뭉치고 싸워서 이기자'는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저도 그 세력 중 하나고, 가장 측근으로 옆 자리에서 모셨어요.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의 의사를 보면 위기가 오면 동교동계 측근, 소위 가신들을 불러서 위기 극복을 하고, 극복이 되면 다시 이분들을 멀리 떼요. 공전하게 하는 거죠. 그런데 저만 1992년부터 서거하시기 전까지 한 번도 옆에서 떨어져 본적이 없어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열심히 한 것 뿐이에요. 혹자는 '박지원이 대학에서 노인심리학을 전공해서 아부를 잘한다'. 저도 많은 모략을 받죠. 그럴 때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천하의 김대중이 누구나 아부는 한 두 달 하면 다 나타난다. 모든 일에 자기의 영혼, 혼을 바쳐서 해야 상대방이 미동을 하지 내가 쇼를 하면 이미 상대방은 안다. 그래서 혼을 바쳐서 일해야 한다". 그런 것을 저는 중시했다고 봐요. 우리 민주당은 김대중과 함께 뭉쳤다. 싸웠고, 언젠가는 이긴다는 신념으로 치열하게 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지지해서 대통령이 됐고 오늘날의 IT 강국, 생산적 복지, 노벨평화상,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정상회담을 이뤘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편에서 계속>

dedanhi@newspim.com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갑질 의혹' 강선우 살린 까닭 [서울=뉴스핌] 이재창 정치전문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20일 이진숙 교육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지명을 철회하고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는 살리기로 했다.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도덕성 논란이 심각한 상황에서 낙마자 없이 넘어갈 수는 없다는 판단에 따라 상징적인 낙마자로 이 후보자를 선택한 것이다. 야당이 강력히 요구한 두 명 중 한 명을 낙마시킴으로써 야당의 체면을 세워주는 모양새를 취하는 동시에 독주한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피하려 한 것이다. 이 대통령 입장에서는 이 후보자 낙마가 측근인 강 후보자에 비해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강 후보자가 낙마할 경우 현역 의원 낙마 1호라는 불명예를 안게 돼 의원직을 수행하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 후보자 낙마로 강 후보자를 구제한 것이다. [서울=뉴스핌] 이길동 기자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26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마련된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2025.06.26 gdlee@newspim.com 이 대통령과 여권 핵심은 지난주 이미 한 명 낙마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우상호 정무수석이 "일부 후보자의 경우 청문회 이후에도 논란이 계속돼 여론이 악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낙마를 사실상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특히 주말 여야 원내대표를 만나 의견을 구한 것은 최소한 한 명의 낙마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야당 대표까지 만나고 모든 후보자를 밀어붙일 경우 독주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주장한 낙마자 제로는 이 대통령의 결단을 부각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낙마자는 없다'는 여당의 강경론에도 이 대통령이 지명 철회를 요구하는 야당과 민심을 수용하는 모양을 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자진 사퇴가 아니라 지명 철회라는 강수는 야당의 요구를 수용하는 모양을 취한 것이다.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이진숙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가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25.07.16 mironj19@newspim.com 관심은 낙마자가 한 명이냐, 아니면 두 명이냐였다. 두 후보자 모두 낙마 1순위였다. 한 명을 살리기 어려울 정도로 막상막하였다. 논문 표절과 자녀 불법 조기 유학 의혹이 불거진 데다 전문성도 결여돼 있다는 지적을 받은 이 후보자의 낙마는 사실상 결정된 상태였다. 여기에 강 후보자까지 포함시킬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파상 공세를 취하는 야당이 문제가 아니었다. 두 후보자에 대해 진보색이 강한 시민 단체마저 낙마를 요구했다. 여론을 중시하는 이 대통령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 지지 세력이 등을 돌릴 수 있어서다. 이런 상황에서 이 후보자 낙마와 강 후보자 구제는 여당 기류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대통령실 주변에서 "이 후보자는 외부에서 추천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 것은 낙마자가 나올 경우 1순위는 이 후보자가 될 수 있음을 강하게 시사한 것이다. 낙마하더라도 부담이 덜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당 분위기는 더 노골적이었다. 강 후보자에 대해서는 입단속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 후보자에 대해서는 특별한 지침이 없었다고 한다. 이를 반영하듯 강 후보자에 대해서는 지난주 중반까지 여론이 싸늘했지만 그 이후 당 주변에서는 더 이상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 이 후보자에 대해서는 달랐다. 김상욱 의원에 이어 강득구 의원이 공개적으로 이 후보자를 비판하며 거취를 거론했다. 강 의원은 "연구 윤리 위반, 반민주적 행정 이력, 전문성 부족 등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중대 결격 사유"라고 말했다. 이 후보자 낙마로 분위기를 몰아가는 듯했다.   이 후보자는 논문 표절 문제가 컸지만 이재명 정부가 전면에 내세운 유능함도 보여주지 못한 게 결정적이었다. 여권이 갑질 논란이 심했던 강 후보자를 감싼 논리가 유능함이었다. 청문회 과정에서 유보 통합 등 교육 정책과 관련된 기본적인 사항조차 숙지하지 못해 전문성에 심각한 의구심이 제기됐다. 여당 의원들조차 "어떻게 그런 것도 대답을 하지 못하느냐"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이날 오후 용산 대통령실에서 브리핑을 통해 인사청문회를 거쳤지만 임명이 안 된 11명의 장관 후보자 중 지명 철회는 이 후보자 한 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강 후보자는 임명 절차를 밟을 것임을 시사했다. 강 후보자의 인사청문경과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명을 강행하려면 절차상 국회에 보고서 재송부를 요청해야 하는 만큼 이 대통령은 이른 시일 내에 관련 조치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이 강 후보자를 임명한다고 해도 부담은 남는다. 강 후보자의 사퇴를 요구한 상당수 민주당 보좌진들과 정서적으로 등을 지게 될 수밖에 없다. 강 후보자 사퇴를 요구한 시민단체의 입장도 부담이다. 야당은 여론을 돌리기 위한 파상 공세에 나서고 있다. 강 후보자도 갑질 장관이라는 낙인이 찍힌 상태에서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향후 여론 추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leejc@newspim.com 2025-07-21 06:45
사진
안세영,왕즈이 꺾고 日오픈 우승 [서울=뉴스핌] 장환수 스포츠전문기자= '배드민턴 여제' 안세영(삼성생명)이 시즌 6승을 달성했다. 세계랭킹 1위 안세영은 20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월드투어 슈퍼 750 일본오픈 여자 단식 결승에서 왕즈이(2위·중국)를 42분 만에 2-0(21-12 21-10)으로 완파했다. [서울=뉴스핌] 장환수 스포츠전문기자= 안세영(왼쪽)이 20일 일본오픈 여자 단식 결승에서 우승한 뒤 중국의 왕즈이와 시상대에 올랐다. [사진=BWF 동영상 캡처] 2025.07.20 zangpabo@newspim.com 안세영은 이번 대회 5경기에서 한 게임도 내주지 않는 무결점 플레이를 펼쳤다. 이로써 안세영은 말레이시아오픈, 인도오픈, 오를레앙 마스터스, 전영오픈, 인도네시아오픈에 이어 일본오픈까지 올해에만 6번째 우승컵을 안았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 금메달을 딴 뒤 부상으로 불참한 일본오픈에선 2023년 이후 2년만에 정상을 탈환했다. 안세영은 왕즈이와 상대 전적에서도 13승 4패로 격차를 벌렸다. 특히 올해는 말레이시아오픈, 전영오픈, 인도네시아오픈에 이어 일본오픈에서 왕즈이를 잇달아 꺾었다. [서울=뉴스핌] 장환수 스포츠전문기자= 안세영이 20일 왕즈이와 일본오픈 여자 단식 결승에서 마지막 게임 포인트를 올리고 있다. [사진=BWF 동영상 캡처] 2025.07.20 zangpabo@newspim.com 1게임 10-10으로 맞선 게 유일한 접전이었다. 안세영은 이후 8득점을 내리 따내며 승기를 잡았다. 2게임에서도 두 번 연속 5득점 하며 손쉽게 왕즈이를 꺾었다. 안세영은 22일부터 27일까지 열리는 중국오픈에서 시즌 7관왕에 도전한다. 남자복식 서승재-김원호 조(3위·이상 삼성생명)도 세계랭킹 1위인 말레이시아의 옹유신-테오예이 조를 2-0(21-16 21-17)으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서승재와 김원호는 올해 말레이시아오픈, 독일오픈, 전영오픈, 인도네시아오픈에 이어 5번째 우승을 합작했다. zangpabo@newspim.com 2025-07-20 17:37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