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시절 국제어 에스페란토를 배워 70개국을 여행한 서진수 교수. |
[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 국제공용어인 에스페란토(Esperanto)에 빠져 사는 경제학 교수가 있다. 까까머리였던 중학3년 시절 형을 따라 에스페란토를 배우기 시작해, 지금은 아시아-태평양지역 에스페란토 활동의 결집체인 ‘UEA 아시아-오세아니아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는 서진수(61) 강남대 경제학과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서 교수는 1주일 앞으로 다가온 ‘제102차 에스페란토 세계대회’를 앞두고 바삐 뛰고 있다. 매년 여름마다 전세계를 돌며 열리는 에스페란토 세계대회를 한국이 유치한 것은 지난 1994년 이후 23년 만이다. 세계에스페란토협회가 주최하고, 한국에스페란토협회-102차 세계대회 조직위원회(회장 이영구 한국외대 교수) 주관으로 오는 22일부터 29일까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열리는 이번 대회에는 62개국에서 1150명의 회원이 참가해 주제토론, 포럼, 분과모임 등을 이어간다.
경제사를 연구하는 경제학자이자, 미술시장연구소를 설립해 아트마켓 리서치도 병행하고 있는 서진수 교수는 “에스페란토어를 배우게 되면서 나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물론 긍정적인 쪽으로”라고 밝혔다. 이어 “나는 젊은 시절 에스페란토라는 초강력 로켓을 타고, 대기권 밖으로 훌쩍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박사과정 시절 일본 한 에스페란토 선배회원의 초청을 받아 생활비 비싼 도쿄에 6주간 머물며 에스페란토로 대화하고, 일본어를 집중적으로 배웠던 적이 있다. 6주간의 체험은 평생 잊기 힘든 소중한 시간이었고, 이후 내 삶에도 큰 자양분이 됐다. 그 때부터 내 시야가 활짝 넓어졌고, 가치관도 확 바뀌었다. 아무 조건없이 나를 초청해 학원비까지 대준 그 선배와는 35년째 교류하고 있다. 에스페란토를 배운 후 매년 여름이면 초특급 로켓을 타고, 각국을 순례하고 있다. 돈으론 살 수 없는 체험도 숱하게 했다. 4차 산업혁명이 운위되는 시대이니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를 위해서도 국제어 에스페란토를 배우라고 권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에스페란토 세계대회. 올해는 한국서 열린다. |
서진수 교수를 만나 에스페란토에 빠지게 된 계기와 의미, 올해 세계대회 등에 대해 들어봤다.
-처음 에스페란토를 배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는데 제 경우는 ‘형님 따라 에스페란토 배우러간다’였어요. 12살위 형님을 따라 배웠지요.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세가지’ 중 하나입니다. 그 시간에 영어를 더 하는 게 낫지 않겠냐 하는데, 하나의 언어를 시(詩)까지 쓸 정도로 완벽하게 하니까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일어, 중국어 학습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아시아가 세계를 주도하는 꿈을 꿔왔는데, 요즘 중국, 일본 연구자들과 아시아미술시장연구연맹(AAMRU)을 만들어 서구 미술계와 당당히 맞서는 꿈을 꾸며 열심히 활동 중입니다. 에스페란토를 통해 세계화와 글로벌 스탠다드에 대한 생각을 기본으로 하며 살 수 있는 게 가장 큰 수확입니다.
- 에스페란토를 활용해 세계 70개국을 여행하셨다죠? 회원들의 협조가 컸나요?
세계에스페란토협회에 현재 121개국이 가입했는데 그 중 70개국을 돌아봤지요. 아직 못가본 나라도 1/3이나 됩니다. 항공료와 최소숙박비를 준비하고, 여행국 협회에 연락하거나 여권서비스(Pasporta Servo)라는 회원간 민박제도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실질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다 비용도 최소화할 수 있었지요. 47년간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면서 여러 나라에서 한국, 경제, 미술시장, 아시아문화에 대해 특강을 하면서 환대를 받아가며 여행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여행을 꼽는다면요
1990-1년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 동유럽 5개국에서 <한국경제의 기적>을 주제로 강연하며 여행한 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동유럽 사회주의를 지근거리서 경험했지요. 또 캐나다 미술관 1개월 여행, 아프리카 8개국 24일 여행, 런던 회원집의 1박 1파운드(1,500원) 숙박료 여행도 인상적이었습니다. 5년간의 러시아에서의 <알타이 암각화탐사>도 잊을 수 없지요. 30년 전 영국 글래스고대학 교환교수 문제를 단 5분 만에 전화통화로 해결해준 니스벳 교수, 크로아티아 세계대회에서 만난 독일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셀턴 박사 등 기억에 남는 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올 세계대회에 비용 때문에 참가 못하는 아시아 회원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안하셨다는데.
아시아에서는 국제교류 시에 지원을 필요로 하는 국가가 아직 많습니다. 한국서 열리는 세계대회에 아시아인이 더 많이 참석해 아시아인들의 축제를 만들고 싶어 <아시아 카라반>이란 타이틀로 인도, 필리핀, 베트남, 몽골, 네팔, 동티모르 등 12개국 12명을 초청했습니다. 한국과 일본 회원을 대상으로 십시일반으로 후원금을 모았고, 신청자를 심사해 선정한 후 주재국 대사관 등을 통해 초청장을 보냈지요. 젊은 시절 제가 받았던 후원을 30년 후 되돌려줄 수 있게 돼 뿌듯합니다.
-에스페란토는 누가 언제 만들었나요?
폴란드 안과의사 라자로 루도비코 자멘호프(1859~1917) 박사가 오랜 연구 끝에 1887년에 공식으로 발표하였지요. 어근과 문법은 7개의 유럽 언어에서 힌트를 얻어 새로 만들었고, 발음은 쓴대로 읽고, 읽는대로 써서 발음기호가 필요 없습니다. 세계로 빠르게 파급돼 121개국에 전파된 게 이를 입증하지요. 에스페란토 사용자들은 ‘1민족 2언어주의’에 입각해 같은 민족끼리는 모국어를, 다른 민족과는 중립적인 국제공용어인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운동을 펼치지요. 에스페란토를 상징하는 것은 초록별인데 초록색은 평화, 별은 희망을 뜻합니다.
- 에스페란토 세계대회는 역사가 100년을 넘었는데 그 의의는 무엇인지요.
언어를 통한 인류평화 증진을 목표로 하는 에스페란토 세계대회는 1905년 프랑스 블로뉴쉬르메르에서 시작돼 1차 세계대전 기간을 제외하곤 매년 국가를 바꿔 열리는 국제회의입니다. 말이 통하는 것이 서로를 이해하는 길이고, 상호간 이해가 인류평화의 기본이라는 사상을 가진 언어제전이자 국제평화운동이지요.
- 금년에 한국에서 세계대회가 열리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2010년대 초부터 서울대회 유치에 관한 의견이 국내외적으로 제기됐고, 2014년 본격적인 준비작업에 들어가 2015년 프랑스 릴에서 열린 제100차 에스페란토 세계대회 기간 중 캐나다와 치열한 경합 끝에 확정됐습니다. 1994년 첫 세계대회 때보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져 국력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에스페란토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궁금한데요?
에스페란토 운동은 언어제국주의를 막고, 인류가 상호소통을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한 일본인이 “조선인(한국인)은 조선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바로 에스페란토 사용자였습니다. 세계대전 기간에는 유럽 각국의 군인들에게 전달되는 편지를 분류하는데 참여한 봉사자들이 에스페란토 사용자였고요.
- 국가 대표가 아닌 일반인들이 모이는데 세계인의 이번 대회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요?
각국의 에스페란토 사용자들과 네트워크를 통해 꾸준히 홍보를 해왔고, 한국관광공사와 서울관광마케팅의 재정적인 지원도 큰 몫을 했습니다. 그동안 에스페란토 세계협회와 각종 단체의 회장과 임원을 배출한 배경, 한국이 정치, 경제, 문화, IT 등에서 아시아 에스페란토 운동을 주도하는 국가 중 하나로 부각돼 호응이 좋았습니다.
- 이번 세계대회의 주제와 행사내용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관광의 지속가능성>이란 주제로 열리기 때문에 한국의 분단상황 등이 주제에 잘 부합됩니다. 비무장지대 방문, 통일에 관한 비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는데 통일문제에 대해 세계인의 관심이 많아 세계 일반인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 영어의 세력이 강력한 시대에 국제어 에스페란토의 파급력은 어떠합니까?
영어는 70여개국에서 사용하는 국어로서 세계적으로 강력한 파워를 갖고 있지요. 허나 우월한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강요하는 게 아쉽습니다. 에스페란토는 ‘1민족 2언어주의’를 표방하는 중립적인 언어이고, 사용자들이 모두 학습을 통해 배운 평등한 회원으로 구성돼 있어 상호간 이해성이 매우 높습니다. ‘언어를 통한 세계평화에의 기여’라는 구성원간의 정체성이 분명하고, 유대관계가 강력합니다. 대단히 민주적인 공용어이지요.
-자라나는 세대에게 ‘에스페란토를 배우라’고 적극 권하시던데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에스페란토를 배우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영어만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에스페란토를 배우면 영어 불어 독어 중국어 학습도 한결 수월해집니다. 게다가 에스페란토는 배우기 무척 쉬운 언어이지요. 두세 달정도면 기초는 마스터할 수 있습니다. 미래 세대는 지구촌을 앞집 드나들 듯 다녀야 할텐데 에스페란토를 배우면 각국을 보다 수월하게, 적은 비용으로 다니며 안목과 관점도 넓히면서 생생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꼭 권하고 싶군요.
[뉴스핌 Newspim] 이영란 편집위원 (art29@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