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최원진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시 백악관에 입성하면서 세계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우리는 냉전 이후 지난 80년 동안 유지돼 온 미국 주도의 '서구 중심 세계'의 종말을 목도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대한 방위비 인상 압박과 대대적인 관세 전쟁 선포는 트럼프 정부 1기를 겪어봤기에 예상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이 제대로 방위비를 내지 않으면 러시아가 침공하더라도 미국은 방어하지 않겠다느니,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끊겠다는 등의 발언은 나토의 근본을 흔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2월 12일(현지시간) 러시아와 직접 협상을 개시한 것은 유럽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유럽의 장기적인 안보에 직접 영향을 미칠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협상에 유럽은 물론이고 당사국인 우크라이나마저 패싱(passing·배제)하면서 미국과 유럽의 오랜 안보 동맹에 큰 균열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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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진 국제부 기자 |
그달 14~16일 독일 뮌헨안보회의에서 유럽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비난한 J.D. 밴스 미국 부통령의 언사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유럽은 러시아나 중국이 아니라 내부에 심각한 위협이 있다"라며 표현의 자유의 민주주의 가치가 후퇴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유럽과 미국이 전통적으로 공유해온 가치를 부정한 발언이었다. 대통령도 아니고 부통령이 그것도 유럽 땅에서 '유럽의 민주주의 후퇴'를 언급한 것은 사실상 유럽 '친구'들에게 절교하자고 말한 격이었다.
그로부터 2주 후인 지난달 28일 백악관을 방문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한 기자로부터 "왜 정장을 입지 않았냐, 정장이 있기는 한 거냐?"라는 조롱을 들어야 했고, 밴스 부통령부터는 "무례하다" "미국에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다"란 말을 들어야 했고 이 장면은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안전보장 장치가 없는 광물 협정 서명을 거부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가 끝났음에도 선거를 치르지 않는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미국이 동맹의 안보를 무조건 보장해 주는 시대는 끝났다. 세계는 냉전기 때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전 세계를 양분하는 '이극체제(bipolarity)'에서 현재 미국 단독 패권의 '일극체제(unipolarity)'를 지나 '다극체제(multipolarity)'로 이동하고 있다.
이극체제에서는 한쪽의 승리가 다른 한쪽의 패배였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이 패권을 잡은 일극체제에서는 미국이 모든 전선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세계 경찰'이란 일극적 책임이 뒤따랐다.
하지만 다극체제가 도래하면 미국이 모든 문제에 직접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책임 전가(buck-passing)' 전략 선택이 가능하다. 국제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의 이론에 따르면, 책임 전가란 어떤 침략 세력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은 인식하지만, 그 부담을 다른 국가에 떠넘기는 전략이다. 미국이 반드시 직접 싸우기보다 적대적 국가끼리 알아서 견제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인도와 중국의 갈등,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대립 같은 지역 강대국 간의 경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고 적대국끼리 알아서 견제하도록 유도한다거나, 미국이 2021년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통해 탈레반, ISIS-K 등 극단주의 세력 문제를 중국, 러시아, 이란 등 인접국들이 감당하도록 떠넘기는 등의 형식이다.
이는 미국이 더는 직접 나서지 않고도 자국 이익과 패권을 유지하려는 계산된 행동이다. 미국은 부담을 덜겠지만, 공백을 메우려는 강대국 간 충돌로 인해 세계는 더욱 불안정해질 수 있다.
특히 유럽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미국을 100% 의존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과 마주하게 됐다. 다극체제란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한국이 생존하려면 한미동맹에만 의존하던 기존의 안보 전략에서 벗어나 일본, 호주, 인도 등 다른 역내 강국들과 새로운 협력을 도모하고 동시에 한국의 독자적인 억지력을 강화할 때가 아닐지 생각해 본다.
wonjc6@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