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곡동 빌라왕에서 광주 빌라왕까지…거미줄처럼 연결된 '악의 고리'
공인중개사·중개보조원 등 핵심적인 역할
수도권 일대에서 빌라·오피스텔 1139채를 임대하다가 전세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은 채 숨진 '빌라왕' 김모(42) 씨. 그는 사망했지만 그가 남긴 피해는 여전하다. 빌라시장은 김씨의 타깃이 됐다. 신축이냐 구축이냐에 따라 수법이 조금씩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빌라왕을 비롯한 전세시장의 무법자들은 폭탄을 돌리듯 빌라를 거래했다. 시한폭탄과 같은 깡통빌라는 그렇게 지어지고, 사들여지고, 다시 떠넘겨졌다가 누군가의 눈물이 됐다. 뉴스핌은 빌라왕 김씨 사례를 중심으로 온갖 편법과 불법의 온상이 된 빌라시장을 들여다봤다.
[서울=뉴스핌] 지혜진 기자 = 빌라왕 김모 씨, 광주 빌라왕 정모 씨, 관악·구로 빌라왕 송모 씨 등 전국의 빌라왕들을 연결하는 건 공인중개사 내지는 중개보조원들이었다. 전세계약 등 관련 제도를 잘 아는 이들이 법의 허점을 악용해 전국의 수많은 빌라왕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13일 뉴스핌 취재 결과 빌라왕 김씨와 연관된 한 부동산 컨설팅 업체는 관악·구로 빌라왕, 광주 빌라왕 등과도 같이 일한 것으로 드러났다.
['빌라왕', 그리고] 글싣는 순서
1. 건축주→집주인→임차인으로 이어지는 '폭탄 돌리기'
2. [단독] 임차인 몰아낸 후 '뻥튀기' 된 집값
3. 전세사고 급증하는 동안...건축왕·빌라의신 등 활개
4. "이자비 최대 5000만원"…여전히 존재하는 '깡통전세'
5. 사망한 김씨 추적하니 또 다른 '왕'들이 나왔다
6. 잇단 전세사기 사건…원인은
서울 관악구에 있는 △△부동산은 빌라왕 김씨가 구축 빌라를 매매하고 나면 등장했다. "새로운 집주인이 돈이 없어 이 집을 급매에 넘길 예정"이라며 "전세금을 못 받게 될 수 있으니 이사 나가는 게 좋을 것"이라는 식이었다. 그렇게 기존 임차인이 나가면 수천만원에서 1억원 가까이 비싸게 새로운 임차인을 들여 차익을 남겼다.
△△부동산은 빌라왕 김씨뿐 아니라 전국의 다양한 빌라왕과 연관돼 있었다. △△부동산은 △△주택이라는 법인을 보유하고 있다. 등기부등본상 대표이사는 서모(31) 씨이며 사내이사 전모(29) 씨, 감사 이모(29) 씨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가운데 서씨와 전씨는 최근 광주 빌라왕 50대 정씨의 공범으로 지목됐다. 광주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이들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조사 중이다.
이들은 광주 빌라왕 정씨와 2019~2020년 매매가를 웃도는 전세보증금으로 주택을 사들이는 '갭투자' 방식으로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지난 11일 이들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에서 증거 인멸과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돼 불구속 수사 중이다.
정씨는 자신의 동생과 노숙인 홍모(65) 씨의 명의를 이용해 피해를 일으킨 것으로도 알려졌다. △△주택은 정씨의 동생과 함께 법인을 설립한 이력도 있다. 2020년 5월 설립된 △△주택매매법인에는 △△주택의 서씨, 이씨, 전씨를 비롯해 정씨의 동생이 감사로 등재돼 있다.
△△부동산 소속 중개보조원 박모 씨는 관악·구로 일대에서 신탁부동산을 악용해 전세보증금 38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박씨와 함께 재판에 넘겨진 부동산 실소유주 60대 송씨는 2017년 1월부터 2021년 7월까지 서울 관악구와 구로구 일대에서 빌라, 원룸, 오피스텔 등을 차명으로 소유하며 총 47명으로부터 임대차 보증금 38억원 상당을 편취한 혐의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박씨는 송씨를 대신해 임대차계약을 전담하면서 신탁부동산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채 "보증금을 반환받는 데 문제없다", "집주인이 재산이 많다"고 속여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고, 계약이 성사되면 송씨로부터 수수료(100~200만원)를 받은 혐의를 받는다.
빌라왕 김씨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전세사기에 공인중개사나 중개보조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김씨는 '바지 집주인'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전 희○공인중개사사무소에서 중개보조원으로 일했다. 조모(54) 씨는 이곳의 대표자이자 공인중개사였다. 조씨는 현재 화곡동 빌라왕 강모(56) 씨와 구속기소 된 상태다.
무자본 갭투자자인 강씨는 지난 2015년 9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건축주 등으로부터 집 한 채당 500만∼1500만원의 수수료를 받고 화곡동 빌라 283채를 사들였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 18명으로부터 임차보증금 명목으로 합계 31억6800만원을 편취한 혐의를 받는다.
강씨 사건의 피해자 법률대리인인 신중권 법무법인 거산 변호사는 "강씨 사건에서 가장 많은 수수료를 받는 등 이득을 취한 건 공인중개사 조씨"라며 "조씨와 같은 중개사들이 작정하고 속이면 임차인 입장에서는 아무리 철저히 확인해도 당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씨는 전세사기 이후 건설업을 영위하는 법인을 세운 것으로 확인되는데 자기가 직접 빌라를 건축해서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려던 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며 "전세사기는 '바지 집주인' 뒤에서 공인중개사, 컨설팅업체, 분양대행사 등이 함께 공모한 것"이라고 말했다.
heyjin@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