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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우수에 찬 영원한 방랑자, 구스타프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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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22)

말러는 교향곡을 주로 만든 20세기 초반의 작곡가이다. 그는 9개의 완성된 교향곡과 1개의 미완성 교향곡을 작곡하는 과정에서, 교향곡을 내용면에서 그리고 연주 시간과 규모 면에서 새로운 발전의 단계로 올려놓았다. 또한 베토벤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교향곡에 성악을 주입하는 시도를 자주 하였다.
그의 《교향곡 3번》은 일반적인 교향곡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긴 약 95분 시간을 소요한다. 또 일명 ‘천인 교향곡’으로도 불리는 《교향곡 8번》은 천 명이 넘는 연주자로 편성된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었으며, 교향곡 중 가장 거대한 악기 편성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또 교향곡 일부에 니체와 괴테의 철학, 중세 종교 상징주의와 영성을 표현하는 가사를 사용했다. 그의 작품은 이제 세계 주요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기본 레퍼토리의 일부가 되어 있다.
말러의 음악은 생전에는 그리 자주 연주되지는 않았고, 반응 또한 썩 좋지 않았다. 그나마 대중들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던 작품은 상대적으로 짧고 고전적 형태를 띤 《교향곡 4번》과 1910년 뮌헨 초연에서 좋은 반응을 보인 《교향곡 8번》 정도에 불과했다. 그 이후에 쓴 곡들은 그의 생전에 연주되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부터 레너드 번스타인에 의해 말러의 교향곡은 다시 주목을 받아 활발하게 연주되었으며, 말러 또한 오늘날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작곡가로 위상이 재정립되었다.

말러는 방대한 악기 편성과 거대한 구상을 가진 9개의 교향곡을 완성하여, 후기 낭만파의 웅대하고도 화려한 양식 속에 독일의 전통을 꽃피웠다. 그는 또 가곡 분야에서도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등 여러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이처럼 작품이 교향곡과 가곡에 한정되고, 더구나 이질적인 분야가 훌륭히 융합된 예는 음악사상 드문 일이다.
“나에게 있어서 교향곡이란, 하나의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기술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자신의 표현대로 말러의 교향곡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나 다름없다. 그는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그의 교향곡 속에 담아내려는 듯 갖가지 악기들을 총동원해 온갖 신기한 소리들을 만들어내었다. 그의 교향곡에서는 알프스 산중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방울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고, 때로는 군대의 신호나팔 소리나 술집의 밴드 소리가 끼어들기도 한다. 간혹 거대한 망치가 악기로 등장해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하며, 썰매방울 소리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회초리나 딱따기 같은 이상한 물건들도 오케스트라의 타악기로 당당하게 등장한다.
교향곡을 통해 인생을 표현하고자 했던 말러에게는 기존에 주로 사용되던 악기들만으로는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말러는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소리’를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교향곡 6번과 7번에 사용된 소방울에 대한 일화이다. 말러는 오스트리아 산중의 느낌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소방울 세트를 특별히 주문 제작했다. 그리고 리허설과 연주를 할 때마다 항상 가지고 다녔다. 1906년 11월, 뮌헨에서 교향곡 6번을 리허설할 때는 연주자의 목에 커다란 소방울을 걸게 한 후 앞뒤로 오가게 했다. 음악적 표현을 위해선 이처럼 우스꽝스런 연주법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말러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에는 연주가들이 수시로 무대 앞뒤를 들락날락하기도 하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가 하면, 악기의 관을 높이 들어 올린 채 연주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말러가 악보에 지시한 특별한 음향효과 때문이다.
교향곡을 연주할 때 성악가들이 입장하는 시점도 종종 문제가 되고 있다. 말러는 교향곡 속에 인간의 목소리를 편성함으로써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평가된다. 말러의 교향곡 2번과 3번, 4번, 8번과 《대지의 노래》에 등장하는 인간의 목소리는 오케스트라의 악기처럼 여러 악기들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그러나 성악이 가미된 교향곡이라 해도 《교향곡 8번》과 《대지의 노래》를 제외한 나머지 성악 교향곡의 경우 모든 악장에 성악가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독창자들이 언제 등장해야 할지, 합창단이 어느 부분에서 일어나야 할지를 사전에 정해야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말러의 10개 교향곡 중에서도 2번 《부활》은 가장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작품으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거대한 한 편의 드라마이다. 그가 이 제2번 교향곡의 작곡에 매진하고 있던 1889년에는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11월에 있었던 교향곡 1번의 초연은 말러에게 큰 실망을 맛보게 한다. 그에게 연이어 닥친 이런 불행은 이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교향곡 제2번의 내용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제1악장은 ‘장송행진곡’으로 거인이 무덤에서 그의 생애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되며, 2악장에서는 과거의 회상이 순간의 햇빛처럼 찬란하게 그려진다. 3악장에서는 꿈같이 아름다웠던 현실이, 4악장에서는 독창자 알토가 등장해 ‘신에게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라고 노래하며, 마지막 제5악장에서는 부활을 노래한다. 이 제5악장은 부활교향곡의 백미로 가공할 만한 스케일과 신비감을 자아낸다. 또 여기에는 소프라노와 알토의 독창과 중창, 혼성합창이 골고루 사용되고 있다.

이 말러의 《교향곡 2번》을 가장 잘 지휘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정통 음악인이 아닌 금융잡지사 사장 길버트 카플란이다. 1965년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말러의 2번 교향곡 ‘부활’을 숨죽이며 듣던 23살의 청년 카플란은 번개가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듯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날부터 청년은 자신이 죽기 전에 말러의 '부활'을 직접 지휘해보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마음에 품었다. 그러나 그는 음악이라곤 거의 문외한에 가까운 경영학도였다.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카플란은 월가로 진출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둔다.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은 그는 청년시절의 꿈이었던 말러의 ‘부활’을 직접 지휘해 보기 위해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1983년 카플란이 말러의 ‘부활’을 처음 들은 지 18년이 지났을 때, 그는 마침내 카네기홀 무대에 올라 아메리칸 심포니를 이끌고 ‘부활’을 지휘했다. 그가 처음 ‘부활’을 들었던 바로 그 장소이자 그 오케스트라였다. 그로서는 일생일대의 소원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그의 지휘는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엄청난 호응을 받는다. 그의 지휘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전 세계에서 지휘 요청이 쏟아졌다. 런던 심포니, 로스앤젤레스 필 등으로 부터…

말러의 천인교향곡 연주 공연 <사진=이철환>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1860년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 칼리슈트의 유대인 집안 열네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들이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모는 그가 여섯 살 때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다. 열다섯 살이 되면서는 빈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 연주법과 화성학, 작곡법을 배웠다. 3년 뒤에는 빈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안톤 브루크너가 거기서 강의하고 있었다.
말러는 대학에서 음악뿐만 아니라 역사와 철학도 공부했다. 대학에 다니던 중 첫 주요 작곡 시도로 칸타타 《탄식의 노래》를 지었다. 그러나 이 곡은 콩쿠르에서 낙방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작곡가가 아니라 지휘자의 길로 들어서기로 마음을 바꾼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여 가난한 집안을 돌보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말러의 지휘자로서의 삶은 1880년 오스트리아의 휴양지 바트 할의 여름 극장에서 시작되었다. 그 다음해부터는 차례로 큰 오페라 하우스의 지휘자 자리를 가질 수가 있었다. 1881년 류블랴나, 1882년 올로뮈츠, 1883년 빈, 1884년 카셀, 1885년 프라하, 1886년에는 라이프치히로 갔다.

1887년, 그는 몸이 아프던 아르투르 니키쉬를 대신해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지휘하며 명성을 확고히 다질 수가 있었다. 이처럼 점차 지휘자로서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경제적인 안정을 얻었고 명성도 높아지게 된다. 1891년 그는 함부르크 오페라와 생애 첫 번째 장기계약을 맺었고 거기서 1897년까지 머물렀다. 작곡가로서의 활약이 시작된 것도 이 기간부터인데, 그즈음 교향곡 1~3번을 작곡하였다.
1897년 37세가 되던 해 그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 들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음악적 지위인 빈 국립 오페라하우스의 감독직을 제안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당시의 법에 따르면 유대인은 맡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말러는 유대교에서 로마 가톨릭교로 종교를 바꾸게 된다.
그가 감독으로 재직한 10년 동안 빈 오페라의 레퍼토리와 예술적 기준에 큰 변화가 있었다. 이는 그의 치열한 성격과 완벽주의와 완고한 의지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기간에 말러는 교향곡 4번부터 8번, 《뤼케르트 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북 치는 소년》 등을 작곡했다.

한편, 말러의 개인적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1902년 말러는 알마 쉰들러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그런데 첫째 딸은 성홍열로 다섯 살에 죽게 된다. 딸의 죽음으로 비탄에 빠져 있던 그에게 또 다른 불행이 찾아든다. 자신에게 심장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의사로부터 운동을 제한하고 걸음 수를 세라는 처방을 받았다. 또 예술적 문제에 대한 그의 완고함은 오페라단 안팎에서 많은 적을 만들어내었다. 여기에 언론의 반유대주의적인 공격은 그를 더욱 괴롭혔다. 결국 1907년 빈 오페라 감독직을 사임하게 된다.
이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로부터 지휘자 제안을 받았다. 1908년 거기에서 한 시즌을 지휘했지만, 이듬해 토스카니니에게 밀려나게 된다. 때마침 뉴욕 필하모니에서 요청이 있어 1908년에서 1911년까지의 세 시즌 동안을 지휘했다. 이 시기에 그는 《대지의 노래》와, 마지막 완성작이 된 《교향곡 9번》을 완성했다.

그즈음 말러에게는 여러 가지 불행한 일들이 겹쳐서 일어났다. 우선 부인 알마의 외도이다. 말러의 부인 알마 쉰들러는 20세기 가장 유명한 팜므 파탈(Femme fatale)이었다. 그녀는 말러의 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의 부인이었고, 유명한 작가 프란츠 베르펠의 부인이기도 했다. 이처럼 알마는 세 번이나 결혼했기 때문에 남편 셋 중 누구의 성(姓)을 따를 것인지 난감해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1879년 비엔나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알마는 미모와 지성으로 당시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인물이었다. 여기에 17개의 가곡을 작곡한 재능있는 작곡가이기도 했다. 알마의 아버지는 비엔나의 여러 지식인, 예술가들과 친분을 맺고 지냈다. 그중에는 구스타브 클림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마는 22세 때 말러에게 청혼을 받고 그와 결혼하게 된다. 당시 그녀의 부모는 극렬히 반대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말러의 나이가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 말러는 알마보다 20살이나 많았고 심지어 장인보다도 한 살이 더 많았다. 알마와 말러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순탄치가 않았다. 알마는 음악과 회화에 조예가 깊었으나, 결혼으로 인해 예술활동을 계속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말러 또한 알마가 예술활동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알마는 자기의 예술에 대한 열망을 충족하기 위해 다른 예술가들과의 스캔들을 자주 일으켰다. 첫 상대는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였다. 이 사실을 안 말러는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를 찾아가 자문을 받기까지 했다. 이후 말러가 1911년 세상을 떠나자 알마는 그로피우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알마는 그로피우스와의 결혼생활 중에도 여러 다른 남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그러다가 1920년 그로피우스와 이혼하고 소설가 베르펠과 결혼했다.

말러의 또 다른 불행은 그의 만성적인 심장병현상이었다. 1911년 2월, 그는 연쇄상구균 감염으로 인한 발열이 있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연을 가졌다가 결국 쓰러지고 만다. 결국 심장발작 증세로 1911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나이 50세였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빈 외곽의 그린칭 공동묘지에 잠든 그의 딸 옆에 안장되었다. 이에 따라 작곡 중이던 《교향곡 10번》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말러의 인생은 결코 평탄하지가 않았다. 남들은 한두 개도 겪기 어려운 커다란 슬픔과 고통을 여러 가지 안고 살아가야 했다. 무엇보다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 출신이어서 당시 주류사회에 끼기가 어려웠다는 것, 열네 명의 형제 중 여덟 명이 어린 시절 사망하는 것을 보면서 살아왔다는 것, 가톨릭으로 개종은 했지만 유태인이었기에 유무형의 차별을 당했다는 것, 사랑하는 딸을 다섯 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저세상으로 보낸 아픔을 안고 살았다는 것. 이뿐만 아니라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공공연한 불륜을 지켜봐야 했고, 자신의 불치병으로 인한 고통까지 안고 살아야 했다.

말러는 스스로 이런 탄식을 했다고 한다.
“나는 3중으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보헤미안으로, 독일인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 안에서는 유대인으로서. 그 어디에서도 이방인이었고 환영받지 못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닥친 이러한 고난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오히려 커다란 영감과 에너지가 되어 위대한 말러 음악을 탄생시킨 것은 아닐까?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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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업무보고 논란 [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청와대 영빈관에서 5일 열린 외교·안보 분야 정부 부처의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한반도 평화공존 발전 구상'과 업무보고 발언이 논란을 빚고 있다. 이날 정 장관의 발언 중에는 정부 내 조율을 거치지 않은 사안을 정책으로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것이 있는가 하면 사실 관계에 맞지 않은 설명도 있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신중을 기해 달라고 경고했고, 조현 외교부 장관은 '이상주의적 희망에 근거한 비현실적 구상'이라는 비판을 내놨다. 그동안 정 장관의 대북 정책 관련 발언이 물의를 빚은 적은 여러 번 있지만 대통령과 유관 부처 장관이 공개적으로 부정적 입장을 표명한 것은 이례적이다. 정 장관의 무리한 대북 접근법과 월권을 제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부] 2026.07.23 ◆통일부 장관 권한 넘어선 주장 정 장관은 이날 업무보고에서 '한반도 평화공존 발전 구상'을 설명하면서 이재명 정부 2년차 핵심 과제로 상호 존중·평화적 갈등 해결·핵 없는 한반도 등 3대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정 장관은 "대결과 혐오의 언어는 멈춰야 한다"면서 주적 용어 대체를 주장했다. 지난 25년간의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구도는 이미 무너졌다고도 했다. 또 "현 시점에서 흘러간 선(先)비핵화만 되뇌는 것은 현실을 바꾸는 데 힘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정 장관은 또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바꾸는 논의에 착수하겠다"면서 "북·미 정상회담 견인과 함께 4자 대화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정 장관의 구상에 대부분 제동을 걸었다. 이 대통령은 "평화공존 정책이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측면이 있다"며 "많이 조심하셔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는 "표현에 꼬투리가 잡혀 정쟁으로 휘몰아 들어가면 원래 하고자 했던 데에서 오히려 나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대통령은 남북 신뢰 구축을 위해 9·19 군사합의를 선제적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정 장관의 주장에 대해서도 "우리의 선의대로 하는 게 과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플러스냐, 결론적으로 약간의 의문이 들 때도 있다"며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업무보고 사후 브리핑에서 정 장관이 언급한 '4자 회담'에 대해 "이상주의에 근거한 어떤 희망이라 하더라도 그건 아직 조율되지 않은 방법"이라며 "여러분들께서 디스카운트해 주시면 좋겠다"고 선을 그었다. 정 장관이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EEF)'을 언급하며 "정부 차원에서 (참석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언한 데 대해서도 조 장관은 "그것은 외교부의 몫"이라며 "아직 거기까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고 잘랐다. 정 장관이 이날 소개한 대북 구상과 설명은 정부 내 조율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특히 주적 표현 대체와 국호 사용, 9·19 군사합의 복원, 4자회담 추진 등은 통일부 장관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어서 월권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대통령은 정 장관의 업무보고를 듣고 난 뒤 "여기 업무보고에 발표했다고 승인난 건 아니다"라고 재차 확인했다. 정부의 한 소식통은 "정 장관의 발언 내용은 대부분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거쳐 결정된 사안이 아닌 정 장관의 개인적 생각에 가깝다"며 "안보 관련 부처 장관이 정부의 공식 정책이 아닌 사안을 추진하겠다고 업무보고를 하고 대통령의 면전에서 '국군통수권자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통일 외교 국방 등 외교 안보 부처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2026.08.05 ◆시대착오적 접근, 대북 인식 오류 더욱 문제인 것은 정 장관의 이같은 주장이 현 시점에서 이미 참고가 될 수 없는 과거의 경험 또는 사실과 다른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 장관이 주장하는 구상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북한의 전략과 한반도 및 국제 정세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정 장관이 "흘러간 선(先)비핵화만 되뇌는 것은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고 언급한 것은 지금까지의 대북 접근법을 호도하고 있다. 북핵 위기 발발 이후 지금까지 모든 핵 협상에서 한국이나 미국은 북한에 선비핵화를 공식적으로 요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북핵 협상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한·미가 상응하는 대가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는 핵시설 동결과 중유 제공의 교환이었다. 2005년 9.19 공동성명도 북한의 비핵화 조치의 모든 단계에 상응조치를 제공하는 '행동 대 행동' 원칙이 적용됐다. 대북 협상에 관여했던 한 전직 관료는 "모든 북핵 협상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한·미가 제공하는 상응조치를 어떻게 정교하게 배열하느냐가 관건이었다"면서 "정 장관의 발언은 지금까지 한·미가 북한에 먼저 핵을 포기해야 대화할 수 있다는 정책을 고수해 현 상황에 이르게 됐다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 장관이 "지난 25년간의 CVID 구도가 무너졌다"고 말한 것도 비핵화의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북핵 문제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어떤 명칭을 붙이든 핵을 제거한 뒤 이를 검증하고 재발 방지 조치를 하는 것은 비핵화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기본적 절차"라며 "CVID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검증도 하지 않고 언제든 되돌릴 수 있도록 합의하자는 말과 같다"고 지적했다. [서울=뉴스핌] 이길동 기자 = 조현 외교부 장관이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2026년 하반기 업무보고 사후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6.08.05 gdlee@newspim.com ◆안보 리스크 키우는 통일부 장관 정 장관은 지난해 취임 직후부터 청와대와 외교부를 제치고 통일부가 북한과 관련된 모든 정책을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단독 질주를 거듭해왔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주장을 변형한 '평화적 두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외교부가 미국과 북한 문제를 논의하는 것에 대해 "한반도 정책과 남북관계는 주권의 영역이며 동맹국과 협의의 주체는 통일부"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 한·미 워킹그룹이 남북관계 파탄 원인이었다고 사실과 다른 주장을 폈다. 지난해 업무보고에서는 국제정세를 감안하지 않고 남북대화 재개에만 초점을 맞춘 비현실적 내용으로 논란을 빚었다. 정부 내 조율도 거치지 않고 독자 대북제재인 5·24 조치를 해제하고 9·19 군사합의 비행금지구역 복원을 추진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지난 4월에는 평안북도 구성시에 우라늄 농축 시설이 있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다. 미국은 이 발언을 계기로 한국과 대북정보 공유를 제한했다. 이 조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장관이 이처럼 정부의 공식 결정을 거치지 않은 사안을 정부 정책인 것처럼 주장하며 좌충우돌하는 배경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이 나온다. 북한 문제에서 조기에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조급증과 자신의 존재감 과시 욕구가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일각에서는 정 장관이 2007년 민주당 대선후보였을 때 이재명 대통령이 캠프에서 비서실 부실장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다는 것을 들어 "정 장관이 아직도 이 대통령을 아랫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내놓기도 한다. 한·미 관계와 북한 문제를 오래 다뤘던 전직 관료 출신의 한 전문가는 "정 장관 취임 후 지금까지의 언행은 잘못된 현실 인식에 따른 독단과 앞서 가기, 월권 등으로 점철돼 있다"면서 "통일부 장관이라는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스스로 안보 리스크를 키우는 역할만 했다"고 비판했다. opento@newspim.com 2026-08-06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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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경상수지 최대 흑자 [서울=뉴스핌] 박가연 기자 = 지난 6월 우리나라의 경상수지가 전월에 이어 역대 최대 흑자를 기록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정보기술(IT) 품목 수출 호조로 월간 상품수출이 처음으로 1000억달러를 넘어선 영향이다. [자료=한국은행] 한국은행이 6일 발표한 '2026년 6월 국제수지(잠정)'에 따르면 지난 6월 경상수지는 497억3000만달러 흑자로 집계됐다. 전월(386억1000만달러)에 이어 두 달 연속 월간 기준 역대 최대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에 따라 올해 상반기 누적 경상수지 흑자는 1910억1000만달러를 기록했다. 경상수지 흑자를 견인한 것은 상품수지다. 6월 상품수지는 478억9000만달러 흑자를 기록하며 전월에 이어 역대 최대를 다시 썼다. 국제수지 기준 상품수출은 1123억7000만달러로 전년 동월 대비 84.5% 증가하며 월간 기준 처음으로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상품수입은 644억8000만달러로 38.6% 늘었다. 통관 기준으로는 반도체 수출이 전년 동월 대비 196.9% 급증했고 컴퓨터·주변기기(SSD)는 282.7% 증가했다. IT 품목 수출은 160.4% 늘었으며 비IT 품목도 ▲석유제품(47.5%) ▲화공품(18.6%) ▲철강제품(17.9%) ▲승용차(6.1%) 등을 중심으로 18.6% 증가했다. 통관 기준 수입은 ▲원자재(30.5%) ▲자본재(35.3%) ▲소비재(16.4%)가 모두 늘었다. 서비스수지는 12억9000만달러 적자를 기록해 전월(-10억9000만달러)보다 적자 폭이 확대됐다. 여행수지는 외국인 입국자 증가와 유류할증료 인상 등에 따른 출국자 감소로 4억4000만달러 흑자를 기록했지만 지식재산권사용료수지는 전월 흑자에서 4억4000만달러 적자로 전환됐다. 본원소득수지는 배당소득을 중심으로 32억7000만달러 흑자를 기록해 전월(21억7000만달러)보다 흑자 폭이 확대됐다. 배당소득수지는 배당수입이 늘어난 데다 전월 분기배당에 따른 기저효과로 배당지급이 줄면서 25억6000만달러 흑자를 나타냈다. 금융계정 순자산은 6월 중 467억1000만달러 증가해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증가 폭을 기록했다. 종전 최대였던 올해 3월(369억9000만달러)을 넘어선 것이다. 직접투자에서는 내국인의 해외투자가 80억1000만달러, 외국인의 국내투자가 46억3000만달러 각각 증가했다. 증권투자에서는 외국인의 국내 주식 매도세가 이어졌다. 외국인의 국내 주식 투자는 차익실현 매도 등의 영향으로 316억1000만달러 감소하며 전월(-310억5000만달러)에 이어 역대 최대 순매도 기록을 다시 경신했다. 외국인의 국내 채권투자는 세계국채지수(WGBI) 자금 유입에도 분기 말 만기도래 영향으로 증가 폭이 줄어든 52억9000만달러를 기록했다. 내국인의 해외 증권투자는 주식을 중심으로 35억6000만달러 증가했다. eoyn2@newspim.com 2026-08-0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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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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