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수교 토론의 중의원 속기록, 의회는 과거사를 어떻게 지웠는가
195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전후부터 시작된 한일회담 논의는 이미 제국의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벗어난 중의원 속기록 곳곳에 기록되어 있었다. 1951년 요시다 시게루 내각 시절부터 196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국회 기록을 살펴보면, 패전국 일본이 구 식민지였던 한국과 맺어야 할 새로운 관계의 성격을 두고 여야가 치열한 의미 규정 경쟁을 벌였음이 드러난다.
집권 보수정치는 한일 교섭을 전후 처리의 잔여 과제이자 동아시아 반공 블록 형성이라는 냉전적 실리 차원의 외교 복원으로 규정하려 했다.
반면 사회당과 공산당 등 혁신계 야당은 과거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명확한 사죄와 반성이 결여된 채 진행되는 회담은 정당성을 결여했다고 규정하며, 한일 교섭이 미국의 동아시아 봉쇄 전략에 종속되는 군사적 종속성을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의 언어로 맞섰다.

한일수교의 속기록, 의회는 과거사를 어떻게 지웠는가
1965년 가을, 도쿄 나가타초의 중의원은 1960년 안보투쟁 이래 최대의 정치적 격돌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토 에이사쿠 내각이 서명한 한일기본조약과 부속협정 비준안을 심의하기 위해 소집된 '일한조약 등 특별위원회'의 속기록은, 과거 식민지 지배의 성격과 배상 문제를 둘러싼 여야의 언어가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렸음을 명확한 기록으로 증명한다.
1965년 10월 22일 특별위원회에서 일본사회당의 가쓰마타 세이이치(勝間田清一) 의원은 단상에 올라 사토 총리와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悦三郎) 외상을 정면으로 겨누며 조약의 정당성을 따져 물었다. 가쓰마타는 "과거 36년간에 걸친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해, 정부는 진정으로 불법적인 침략이었다는 반성을 기초로 이번 교섭에 임했는가"라고 추궁했다. 속기록에는 이 질문 직후 (장내 소란), (사회당 의석에서 "사죄하라!", "대답하라!")라는 지문이 기록되었다.
이에 맞선 정부의 공식 언어는 법적 책임을 철저히 차단하는 정교한 회피의 수사학이었다. 같은 날 시이나 외상은 단상에 서서 "불행한 역사적 관계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 바 있으나, 1910년의 한일합병조약은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된 합법적인 조약이었다"라고 강변했다.
사회당 의원들이 격렬히 야유하자, 외무성 조약국장 등 정부 위원들은 청구권 자금 3억 달러의 법적 성격에 대해 "이것은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금이나 보상금이 결코 아니며, 한국의 경제적 자립을 돕고 양국의 우호 협력을 증진하기 위한 순수한 경제협력 자금"이라고 거듭 못 박았다.
속기록 곳곳에는 야당 의석의 ("기만이다!", "진실을 은폐하지 마라!")라는 항의와, 여당 의석의 ("옳소!", "의사진행 방해를 중지하라!")라는 고함이 엇갈리며 회의장이 통제 불능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음이 생생히 적혀 있다.

언어의 질적 측면에서 볼 때, 당시 의회에서 오간 토론은 합리적 사실 규명이나 법리적 검증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극단적인 탈정당화 공격으로 채워져 있었다. 자민당 측은 조약 비준을 '자유 진영의 안전 보장과 아시아 평화를 위한 대승적 결단'이라는 현실주의적 필연성으로 포장하며, 조약에 반대하는 사회당을 향해 "북한과 중공의 입장을 대변하는 비현실적 이념 집단"이자 "국익을 가로막는 무책임한 방해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반면 사회당과 공산당 의원들은 정부의 협상을 "미국의 베트남 침략 전쟁과 동아시아 봉쇄에 종속된 굴욕 외교"이자 "군국주의 부활의 서막"으로 규정했다. 서로의 존재를 대화의 동반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의 언어는 사라지고, 적과 아군을 가르는 배제의 논리와 인신공격만이 속기록의 행간을 가득 채웠다.
이러한 언어의 단절과 파행은 1965년 11월 6일 일한특위, 그리고 11월 12일 새벽 중의원 본회의장에서 일어난 날치기 강행 통과라는 의회 절차의 파괴로 귀결되었다. 11월 12일 새벽 본회의 속기록은 의회 민주주의의 규칙이 물리력 앞에 완전히 무너진 순간을 건조하지만 참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야당 의원들이 의장석 진입로를 막아서고 몸싸움을 벌이자, 후나다 나카(船田中文) 의장은 의장석에 올라 의사봉 대신 진령(振鈴)을 격렬히 울려댔다. 속기록 원문에는 (의장, 진령을 울리다), (장내 극심한 소란, 의장석 주변에 다수의 의원이 쇄도하여 발언 청취 불능)이라는 지문이 적혀 있다.
소란 속에서 의장은 야당의 질의 종결 동의안을 기습 상정했고, 자민당 의원들이 일제히 기립하자 단 수 분 만에 조약 비준안 가결을 선포하고 산회를 선언했다. 토론과 숙의의 공간이어야 할 의회가 다수의 물리적 힘으로 소수를 제압하는 장소로 변질된 순간이었다.
일본 국내정치사에서 이 1965년의 한일조약 처리는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가 완성되는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자민당 정권은 이 비준을 통해 미국이 요구해 온 동아시아 안보 분담과 한·미·일 안보 연대를 공고히 하는 한편, 고도성장 과정에서 축적된 일본의 자본과 잉여 생산설비를 한국 시장으로 팽창시킬 수 있는 경제적 활로를 뚫었다.

국내외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비준을 밀어붙인 보수정치는 식민지 청산이라는 무거운 역사적 질문을 '경제협력'이라는 비정치적 경제 논리로 우회해 버렸다. 과거사에 대한 도덕적·법적 책임 규명을 성장과 실리라는 효율성의 논리로 덮어버리는 전후 일본 보수정치의 언어적 관행이 이때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이다.
한국 사회가 오늘날까지도 집요하게 묻고 있는 한일수교의 진실 또한 바로 이 1965년 일본 중의원 속기록 속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일본사회당과 일본공산당 등 혁신계 야당이 의회 단상에서 쏟아낸 비판의 언어가, 놀랍게도 한국의 민주화 세력과 지식인 사회가 제기해 온 역사적 인식과 정확히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회당과 공산당 의원들은 단상에서 1910년의 한일합병이 제국주의 무력 침략에 의해 강요된 원천 무효의 불법 지배였음을 지적하고, 군국주의 지배에 대한 국가적 사죄와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법적 배상이 전제되지 않은 수교는 역사적 사기극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국내적으로 식민 지배의 빚을 받아낸 배상금이라 설명했던 자금은, 일본 보수정부의 공식 답변 속에서 철저하게 독립축하와 경제협력을 위한 무상·유상 지원금으로 둔갑해 기록되었다.
결국 1965년 체제는 1910년의 조약이 이미 무효인가, 아니면 체결 당시에는 합법적으로 유효했는가라는 핵심적 역사 인식을 양국이 완전히 상반되게 해석할 수 있도록 모호한 어구로 덮어버린 채 봉합한 결과물이었다. 당시 일본의 진보 야당조차 침략의 불법성을 인정하라고 요구했음에도 자민당 정권은 이를 묵살했고, 한국의 박정희 정권 역시 경제개발 자금 확보라는 현실적 실리를 위해 식민 지배의 불법성 규명을 유예했다.
일본 의회 속기록에 남겨진 기록들은 과거사의 진실과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한 채, 양국 집권 세력의 안보적·경제적 계산을 위해 모호성의 언어 뒤로 숨어버렸던 전후 일본 정치가 낳은 구조적 한계와 그 기만의 출발점을 낱낱이 증언하고 있다.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달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kimsh@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