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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장인과의 소송 끝에 쟁취한 사랑, 로베르트 슈만 vs 클라라 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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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17)

슈만의 대표작중의 하나인 《시인의 사랑》은 모두 16개의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각 곡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1곡부터 제6곡까지는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으며, 제7곡부터 제14곡까지는 실연의 아픔을, 마지막 제15곡과 16곡에서는 지나간 청춘의 향수와 실패한 사랑에 대한 쓰라린 심정을 노래한다.

제1곡 〈아름다운 5월에 (Im wunderschonen Monat Mai)〉는 짤막하고 아름다운 서주로 시작되며 매우 사랑스럽고 서정적이다
“아름다운 오월에 꽃봉오리들이 모두 피어날 때
나의 마음속에도 사랑의 꽃이 피어났네
아름다운 오월에 새들이 모두 노래할 때
나도 그 사람에게 고백했네 초조한 마음과 소원을”

그리고 제7곡 〈나는 슬퍼하지 않으리(Ich grolle nicht)〉는 《시인의 사랑》의 중추적인 곡이다. 시인이 노랫말처럼 이제 자신의 사랑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노래하고 있다. 
“나는 울지 않으리 이 가슴이 부풀어 터지더라도
영원히 잃어버린 사랑이여
나는 울지 않으리 그대가 다이아몬드의 빛으로 꾸밀지라도
그대 심중의 어둠을 비쳐줄 빛은 없으리”

낭만주의 음악가의 한사람으로 주옥같은 피아노곡들과 수많은 가곡을 남긴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 그는 1810년 6월 8일에 독일 작센지방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적 출판을 하는 한편 문필에도 종사한 문화인이었고, 어머니는 야무진 성격의 사람이었다. 슈만은 7세 때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부터 기초 교육을 받은 이후 스스로 작곡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또 부친의 책방에서 음악 서적을 읽었고, 바이런과 리히터 등 문인들 작품과 칸트의 철학을 연구하면서 교양을 쌓았다.
슈만의 어머니는 음악의 길로 나아가는 아들을 불안하게 여겼다. 16세 때 아버지가 타계하자, 어머니의 권유로 라이프치히 대학에 들어간 슈만은 법률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도 역시 피아노를 치는 데 열중했다. 놀란 모친은 그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전학시킴으로써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막아 보려 했다.
그런데도 슈만은 여전히 피아노를 배우며 한층 더 음악에 힘썼다. 결국 어머니는 아들이 음악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후 슈만은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당대의 저명한 피아노 선생 프리드리히 비크의 문하로 들어가서, 밤낮없이 피아노 연주에 몰입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무리한 탓이었는지 손가락을 다치게 된다. 더 이상 연주자로서의 꿈을 이어갈 수 없게 된 그가 절망 속에서 찾아낸 길은 연주가가 되는 대신 작곡· 지휘· 평론가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슈만의 이름을 높이는 길이 되었다.

음악가로서 슈만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은 교향곡과 같은 대곡이 아닌 피아노곡과 가곡이다. 특히 슈베르트를 존경한 그는 슈베르트를 능가하는 가곡을 세상에 발표하였다. 슈만의 피아노곡과 가곡에서는 그의 음악세계가 추구하는 서정성과 환상성이 음악과 적절히 조화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전기 낭만주의 시대는 물론이고 독일 정신을 매우 잘 표현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슈만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를 꽃피운 걸출한 작곡가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문학적 소양 또한 깊어서1834년에는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ür Müsik)》를 발행하여 많은 음악평론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슈베르트 · 쇼팽 · 브람스 등의 대음악가들을 세상무대에 소개하였다.

슈만과 클라라 부부의 초상화 <사진=이철환>

슈만과 그의 부인 클라라의 사랑은 한 편의 드라마이다. 그들의 사랑은 갖은 우여곡절을 거친 뒤 마침내 결실을 거두게 된다. 1836년 슈만은 자신의 은사인 비크의 딸이자 유명한 여류 피아니스트인 클라라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시 클라라의 나이는 18세, 슈만은 그보다 9살 위였다. 그런데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는 이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클라라 아버지 비크의 입장에서는 애지중지하는 자랑스러운 딸의 상대로 슈만이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당시 클라라의 명성은 대단했다. 그녀는 아홉 살이던 1828년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공식 연주회를 가졌고, 이후 국외 연주회만도 38회에 이르는 등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였다. 당대의 문호 괴테, 바이올린의 거장 파가니니, 작곡가 멘델스존, 피아노의 귀재 리스트 등 많은 예술가들이 클라라의 피아노 연주를 극찬했다. 또 여러 귀족들로부터 후원도 받고 있었다. 이런 딸이 피아니스트로서는 더 이상 가망이 없고 작곡가로는 무명이나 다름없는 슈만과 결혼하겠다고 하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극렬한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도 슈만과 클라라 두 사람은 자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3년여에 걸쳐 그들의 결혼을 간청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슈만과 클라라는 법에 호소하기로 하고 장인인 비크를 상대로 라이프치히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1840년 9월, 슈만과 클라라는 마침내 법정으로부터 허가를 받아내게 된다. 그해 9월 12일 클라라가 21세가 되기 전날을 기해 두 사람은 교회에서 조촐한 식을 올린 뒤 결혼생활에 들어갔다.

분명 결혼 당시에는 클라라가 좀 더 재능이 뛰어나고 장래가 촉망되던 존재였다. 그러나 이 결혼은 당대의 두 재능이 결합됨으로써 후일 음악사에 대단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슈만은 결혼을 하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해 왕성한 창작활동을 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결혼 이후 거의 모든 부문에 걸친 작곡활동을 펼쳐 나갔다.
결혼생활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1843년 슈만은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이때부터 정신착란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점차 병세가 악화되자 드레스덴에 정주하여 개인교수와 창작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후 1850년, 슈만 부부는 드레스덴을 떠나 뒤셀도르프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시립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경제적 면에서 다소 여유가 생기게 된다. 널찍한 주택이 생겨 클라라는 자신만의 독방을 가지게 되었고, 결혼 후 처음으로 거리낌 없이 마음껏 피아노 연습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객실로 쓰던 큰 방에서는 이따금 음악가들을 초대하여 하우스 콘서트를 열었다.
그렇지만 행복도 잠깐, 얼마 후 불행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슈만은 드레스덴 시절부터 이미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뒤셀도르프에 온 뒤부터는 관현악단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갈등을 겪으면서 증상이 악화되었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슈만은 정신이상현상을 보이게 된다.
1854년 2월 27일, 그는 가족들 모르게 집을 나와 라인강 다리 위에서 강에 몸을 던졌다. 요행히 뱃사람이 구해서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때 슈만은 자신이 한 짓에 대해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방에 들어가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 뒤 본 시가지 교외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서 약 2년 반 동안 요양에 힘썼다. 그러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병실에서 1856년 7월 29일,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병동은 예정되었던 철거를 면하여 지금은 슈만 박물관이 되어 있다.

슈만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왔고 나중에는 정신이상증세를 보였는데, 이러한 그의 정신병 증세는 집안내력과 무관치 않다. 출판업자였던 슈만의 아버지는 오래도록 신경쇠약을 앓다가 1826년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슈만의 손위 누이인 에밀리에도 자살했다. 슈만이 열여섯 살 되던 때의 일이었다.
슈만 또한 스물세 살이던 1833년부터 정신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슈만은 손가락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으며, 또 좋아했던 큰형 율리우스와 형수의 죽음 등 불행이 겹쳤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음악평론가로서의 삶을 계획하면서 음악잡지 〈음악신보〉의 창간을 한창 준비하고 있었다.
음악평론가 슈만은 두 개의 필명(筆名)을 사용했다. 하나는 ‘오이제비우스’ (Eusebius)였고, 또 다른 하나는 ‘플로레스탄’(Florestan)이었다. 그런데 오이제비우스는 명상적이고 우울한 인물을 뜻하며, 플로레스탄은 열정이 넘치는 사람을 뜻한다. 이 두 개의 상반된 캐릭터를 자신의 필명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슈만은 극단적인 조울증 환자였다는 것이다. 이 상반된 캐릭터는 그가 작곡한 피아노곡 《사육제 Op.9》에도 등장한다. 이는 모두 21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5곡이 ‘오이제비우스’, 제6곡이 ‘플로레스탄’이다.

거의 한평생을 정신질환에 시달렸던 슈만에게도 꿈처럼 달콤했던 시절이 있었다. 5년간의 열애 끝에 연인 클라라와 결혼했을 때였다. 이 해 한 해 동안에만 자그마치 133개의 가곡을 작곡해내었다. 사랑의 힘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슈만의 생애에서 1840년을 이른바 ‘가곡의 해’라고 부른다.
이 많은 가곡들 중에서도 《시인의 사랑(Dichterliebe)》은 백미다. 이 작품은 슈만이 1840년 여름에 완성한 가곡집으로, 독일 낭만파 시인 하이네의 시집 〈서정적 간주곡〉에 수록되어 있는 66편의 시 가운데 16편을 골라 가곡집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많은 성악가들이 이 《시인의 사랑》을 불렀지만, 그중에서도 바리톤 피셔 디스카우의 노래가 특히 유명하다.
하이네는 백만장자 은행가의 딸인 사촌 여동생 아말리에를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속물근성을 지닌 그녀로부터 냉담하게 거절당하는 비참하고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사랑을 향한 애절한 심정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슈만이 하이네의 시에서 맛보는 사랑에 대한 공감은 아주 각별했을 것이다. 슈만은 우여곡절이 많았던 클라라와의 5년에 걸친 사랑의 열정과, 그 귀중한 사랑이 결혼이라는 선물로 연결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이 작품에 매달렸다. 그리하여 음악사에 길이 남는 명작을 남기게 된 것이다.

슈만의 음악과 인생에 부인 클라라와 함께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은 다름 아닌 요하네스 브람스이다. 브람스가 슈만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1853년 9월 30일,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는 당시 거의 무명에 가까운 신인 피아니스트로서, 친구 요하임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뒤셀도르프에 있던 슈만의 집을 방문했다.
브람스가 슈만을 방문하기 이전의 일로, 한번은 브람스가 함부르크에서 연주회를 가지고 나서 슈만에게 그의 작품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슈만은 그의 작품을 개봉도 않은 채 반송했다. 브람스는 그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아 더 이상 슈만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브람스는 슈만의 작품을 면밀히 연구해 본 결과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슈만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와 그의 작품을 들어본 슈만 부부는 브람스의 음악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브람스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슈만은 〈새로운 길〉이라는 에세이에서 ‘시대의 정신에 최고의 표현을 부여한 사람’이라고 그를 격찬했다. 브람스 역시 이들 부부에 대한 깊은 존경과 친밀감이 더해 갔음은 물론이다. 이후 그들 간의 관계는 갈수록 친밀해져 갔다.

이처럼 브람스에게 있어 슈만은 음악적 스승이자 인생의 중요한 길잡이였다. 그러나 클라라라는 존재는 브람스에게 있어 연모하는 ‘여인’이었다. 브람스는 클라라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지닌 채로 다른 여인들과는 이렇다 할 로맨스 없이 한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사실 브람스는 슈만이 살아있을 동안 내내 자신이 연모하는 여인 클라라와, 은인이요 스승인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 사이에서 끝없는 고민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브람스는 심지가 굳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결국 사랑의 감정을 억제하며 우정과 존경의 마음으로 대체함으로써 세 사람의 관계를 원만히 이루어나가기로 했다. 브람스는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창작에 열정을 쏟아 나갔다. 그러던 중 브람스는 1853년 슈만이 라인강에 투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브람스는 즉시 클라라에게로 달려갔다. 브람스는 깊은 상처를 받고 힘들어하는 클라라를 최선을 다해 위로하고 도왔다.
이후 브람스는 클라라가 여생을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곁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이게 된다. 이처럼 클라라의 슬픔을 달래고 공감을 나누는 동안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한층 더 깊어갔다. 마침내 브람스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감추고는 더 이상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클라라가 자신보다 14살 연상이라는 사실도 브람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브람스는 종종 편지로 그의 끓어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클라라의 답장에는 항상 매정하게도 자신은 슈만의 아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내용만이 담겨져 있었다. 즉 남편 슈만이 사망한 이후 클라라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란 오직 남겨진 7명의 아이들 양육과 슈만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라고 답했다.

결국 브람스와 클라라 두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서로를 위로하고 도우면서 각자 예술가로서의 창작에 몰두했다. 오히려 브람스는 그 이후 한층 더 심오한 대작들을 쏟아내게 된다. 불타는 정열을 예술적 영감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클라라를 처음 만난 20살부터 64살로 타계하기까지 늘 브람스의 마음속에 있었던 존재는 클라라였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향한 연모의 열정을 모두 음악 창작에 쏟았던 것이다.
1896년 5월 20일 클라라가 77세의 나이로 타계했을 때 브람스는 “나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산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듬해 1897년 4월 3일 대작곡가 브람스는 64세를 일기로 클라라의 뒤를 따라갔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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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업무보고 논란 [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청와대 영빈관에서 5일 열린 외교·안보 분야 정부 부처의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한반도 평화공존 발전 구상'과 업무보고 발언이 논란을 빚고 있다. 이날 정 장관의 발언 중에는 정부 내 조율을 거치지 않은 사안을 정책으로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것이 있는가 하면 사실 관계에 맞지 않은 설명도 있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신중을 기해 달라고 경고했고, 조현 외교부 장관은 '이상주의적 희망에 근거한 비현실적 구상'이라는 비판을 내놨다. 그동안 정 장관의 대북 정책 관련 발언이 물의를 빚은 적은 여러 번 있지만 대통령과 유관 부처 장관이 공개적으로 부정적 입장을 표명한 것은 이례적이다. 정 장관의 무리한 대북 접근법과 월권을 제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부] 2026.07.23 ◆통일부 장관 권한 넘어선 주장 정 장관은 이날 업무보고에서 '한반도 평화공존 발전 구상'을 설명하면서 이재명 정부 2년차 핵심 과제로 상호 존중·평화적 갈등 해결·핵 없는 한반도 등 3대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정 장관은 "대결과 혐오의 언어는 멈춰야 한다"면서 주적 용어 대체를 주장했다. 지난 25년간의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구도는 이미 무너졌다고도 했다. 또 "현 시점에서 흘러간 선(先)비핵화만 되뇌는 것은 현실을 바꾸는 데 힘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정 장관은 또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바꾸는 논의에 착수하겠다"면서 "북·미 정상회담 견인과 함께 4자 대화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정 장관의 구상에 대부분 제동을 걸었다. 이 대통령은 "평화공존 정책이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측면이 있다"며 "많이 조심하셔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는 "표현에 꼬투리가 잡혀 정쟁으로 휘몰아 들어가면 원래 하고자 했던 데에서 오히려 나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대통령은 남북 신뢰 구축을 위해 9·19 군사합의를 선제적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정 장관의 주장에 대해서도 "우리의 선의대로 하는 게 과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플러스냐, 결론적으로 약간의 의문이 들 때도 있다"며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업무보고 사후 브리핑에서 정 장관이 언급한 '4자 회담'에 대해 "이상주의에 근거한 어떤 희망이라 하더라도 그건 아직 조율되지 않은 방법"이라며 "여러분들께서 디스카운트해 주시면 좋겠다"고 선을 그었다. 정 장관이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EEF)'을 언급하며 "정부 차원에서 (참석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언한 데 대해서도 조 장관은 "그것은 외교부의 몫"이라며 "아직 거기까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고 잘랐다. 정 장관이 이날 소개한 대북 구상과 설명은 정부 내 조율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특히 주적 표현 대체와 국호 사용, 9·19 군사합의 복원, 4자회담 추진 등은 통일부 장관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어서 월권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대통령은 정 장관의 업무보고를 듣고 난 뒤 "여기 업무보고에 발표했다고 승인난 건 아니다"라고 재차 확인했다. 정부의 한 소식통은 "정 장관의 발언 내용은 대부분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거쳐 결정된 사안이 아닌 정 장관의 개인적 생각에 가깝다"며 "안보 관련 부처 장관이 정부의 공식 정책이 아닌 사안을 추진하겠다고 업무보고를 하고 대통령의 면전에서 '국군통수권자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통일 외교 국방 등 외교 안보 부처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2026.08.05 ◆시대착오적 접근, 대북 인식 오류 더욱 문제인 것은 정 장관의 이같은 주장이 현 시점에서 이미 참고가 될 수 없는 과거의 경험 또는 사실과 다른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 장관이 주장하는 구상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북한의 전략과 한반도 및 국제 정세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정 장관이 "흘러간 선(先)비핵화만 되뇌는 것은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고 언급한 것은 지금까지의 대북 접근법을 호도하고 있다. 북핵 위기 발발 이후 지금까지 모든 핵 협상에서 한국이나 미국은 북한에 선비핵화를 공식적으로 요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북핵 협상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한·미가 상응하는 대가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는 핵시설 동결과 중유 제공의 교환이었다. 2005년 9.19 공동성명도 북한의 비핵화 조치의 모든 단계에 상응조치를 제공하는 '행동 대 행동' 원칙이 적용됐다. 대북 협상에 관여했던 한 전직 관료는 "모든 북핵 협상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한·미가 제공하는 상응조치를 어떻게 정교하게 배열하느냐가 관건이었다"면서 "정 장관의 발언은 지금까지 한·미가 북한에 먼저 핵을 포기해야 대화할 수 있다는 정책을 고수해 현 상황에 이르게 됐다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 장관이 "지난 25년간의 CVID 구도가 무너졌다"고 말한 것도 비핵화의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북핵 문제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어떤 명칭을 붙이든 핵을 제거한 뒤 이를 검증하고 재발 방지 조치를 하는 것은 비핵화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기본적 절차"라며 "CVID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검증도 하지 않고 언제든 되돌릴 수 있도록 합의하자는 말과 같다"고 지적했다. [서울=뉴스핌] 이길동 기자 = 조현 외교부 장관이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2026년 하반기 업무보고 사후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6.08.05 gdlee@newspim.com ◆안보 리스크 키우는 통일부 장관 정 장관은 지난해 취임 직후부터 청와대와 외교부를 제치고 통일부가 북한과 관련된 모든 정책을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단독 질주를 거듭해왔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주장을 변형한 '평화적 두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외교부가 미국과 북한 문제를 논의하는 것에 대해 "한반도 정책과 남북관계는 주권의 영역이며 동맹국과 협의의 주체는 통일부"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 한·미 워킹그룹이 남북관계 파탄 원인이었다고 사실과 다른 주장을 폈다. 지난해 업무보고에서는 국제정세를 감안하지 않고 남북대화 재개에만 초점을 맞춘 비현실적 내용으로 논란을 빚었다. 정부 내 조율도 거치지 않고 독자 대북제재인 5·24 조치를 해제하고 9·19 군사합의 비행금지구역 복원을 추진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지난 4월에는 평안북도 구성시에 우라늄 농축 시설이 있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다. 미국은 이 발언을 계기로 한국과 대북정보 공유를 제한했다. 이 조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장관이 이처럼 정부의 공식 결정을 거치지 않은 사안을 정부 정책인 것처럼 주장하며 좌충우돌하는 배경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이 나온다. 북한 문제에서 조기에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조급증과 자신의 존재감 과시 욕구가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일각에서는 정 장관이 2007년 민주당 대선후보였을 때 이재명 대통령이 캠프에서 비서실 부실장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다는 것을 들어 "정 장관이 아직도 이 대통령을 아랫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내놓기도 한다. 한·미 관계와 북한 문제를 오래 다뤘던 전직 관료 출신의 한 전문가는 "정 장관 취임 후 지금까지의 언행은 잘못된 현실 인식에 따른 독단과 앞서 가기, 월권 등으로 점철돼 있다"면서 "통일부 장관이라는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스스로 안보 리스크를 키우는 역할만 했다"고 비판했다. opento@newspim.com 2026-08-06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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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경상수지 최대 흑자 [서울=뉴스핌] 박가연 기자 = 지난 6월 우리나라의 경상수지가 전월에 이어 역대 최대 흑자를 기록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정보기술(IT) 품목 수출 호조로 월간 상품수출이 처음으로 1000억달러를 넘어선 영향이다. [자료=한국은행] 한국은행이 6일 발표한 '2026년 6월 국제수지(잠정)'에 따르면 지난 6월 경상수지는 497억3000만달러 흑자로 집계됐다. 전월(386억1000만달러)에 이어 두 달 연속 월간 기준 역대 최대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에 따라 올해 상반기 누적 경상수지 흑자는 1910억1000만달러를 기록했다. 경상수지 흑자를 견인한 것은 상품수지다. 6월 상품수지는 478억9000만달러 흑자를 기록하며 전월에 이어 역대 최대를 다시 썼다. 국제수지 기준 상품수출은 1123억7000만달러로 전년 동월 대비 84.5% 증가하며 월간 기준 처음으로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상품수입은 644억8000만달러로 38.6% 늘었다. 통관 기준으로는 반도체 수출이 전년 동월 대비 196.9% 급증했고 컴퓨터·주변기기(SSD)는 282.7% 증가했다. IT 품목 수출은 160.4% 늘었으며 비IT 품목도 ▲석유제품(47.5%) ▲화공품(18.6%) ▲철강제품(17.9%) ▲승용차(6.1%) 등을 중심으로 18.6% 증가했다. 통관 기준 수입은 ▲원자재(30.5%) ▲자본재(35.3%) ▲소비재(16.4%)가 모두 늘었다. 서비스수지는 12억9000만달러 적자를 기록해 전월(-10억9000만달러)보다 적자 폭이 확대됐다. 여행수지는 외국인 입국자 증가와 유류할증료 인상 등에 따른 출국자 감소로 4억4000만달러 흑자를 기록했지만 지식재산권사용료수지는 전월 흑자에서 4억4000만달러 적자로 전환됐다. 본원소득수지는 배당소득을 중심으로 32억7000만달러 흑자를 기록해 전월(21억7000만달러)보다 흑자 폭이 확대됐다. 배당소득수지는 배당수입이 늘어난 데다 전월 분기배당에 따른 기저효과로 배당지급이 줄면서 25억6000만달러 흑자를 나타냈다. 금융계정 순자산은 6월 중 467억1000만달러 증가해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증가 폭을 기록했다. 종전 최대였던 올해 3월(369억9000만달러)을 넘어선 것이다. 직접투자에서는 내국인의 해외투자가 80억1000만달러, 외국인의 국내투자가 46억3000만달러 각각 증가했다. 증권투자에서는 외국인의 국내 주식 매도세가 이어졌다. 외국인의 국내 주식 투자는 차익실현 매도 등의 영향으로 316억1000만달러 감소하며 전월(-310억5000만달러)에 이어 역대 최대 순매도 기록을 다시 경신했다. 외국인의 국내 채권투자는 세계국채지수(WGBI) 자금 유입에도 분기 말 만기도래 영향으로 증가 폭이 줄어든 52억9000만달러를 기록했다. 내국인의 해외 증권투자는 주식을 중심으로 35억6000만달러 증가했다. eoyn2@newspim.com 2026-08-0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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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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