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라씨로
KYD 디데이

[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장인과의 소송 끝에 쟁취한 사랑, 로베르트 슈만 vs 클라라 슈만

기사입력 : 2017년11월10일 12:00

최종수정 : 2017년11월10일 12:00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17)

슈만의 대표작중의 하나인 《시인의 사랑》은 모두 16개의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각 곡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1곡부터 제6곡까지는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으며, 제7곡부터 제14곡까지는 실연의 아픔을, 마지막 제15곡과 16곡에서는 지나간 청춘의 향수와 실패한 사랑에 대한 쓰라린 심정을 노래한다.

제1곡 〈아름다운 5월에 (Im wunderschonen Monat Mai)〉는 짤막하고 아름다운 서주로 시작되며 매우 사랑스럽고 서정적이다
“아름다운 오월에 꽃봉오리들이 모두 피어날 때
나의 마음속에도 사랑의 꽃이 피어났네
아름다운 오월에 새들이 모두 노래할 때
나도 그 사람에게 고백했네 초조한 마음과 소원을”

그리고 제7곡 〈나는 슬퍼하지 않으리(Ich grolle nicht)〉는 《시인의 사랑》의 중추적인 곡이다. 시인이 노랫말처럼 이제 자신의 사랑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노래하고 있다. 
“나는 울지 않으리 이 가슴이 부풀어 터지더라도
영원히 잃어버린 사랑이여
나는 울지 않으리 그대가 다이아몬드의 빛으로 꾸밀지라도
그대 심중의 어둠을 비쳐줄 빛은 없으리”

낭만주의 음악가의 한사람으로 주옥같은 피아노곡들과 수많은 가곡을 남긴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 그는 1810년 6월 8일에 독일 작센지방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적 출판을 하는 한편 문필에도 종사한 문화인이었고, 어머니는 야무진 성격의 사람이었다. 슈만은 7세 때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부터 기초 교육을 받은 이후 스스로 작곡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또 부친의 책방에서 음악 서적을 읽었고, 바이런과 리히터 등 문인들 작품과 칸트의 철학을 연구하면서 교양을 쌓았다.
슈만의 어머니는 음악의 길로 나아가는 아들을 불안하게 여겼다. 16세 때 아버지가 타계하자, 어머니의 권유로 라이프치히 대학에 들어간 슈만은 법률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도 역시 피아노를 치는 데 열중했다. 놀란 모친은 그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전학시킴으로써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막아 보려 했다.
그런데도 슈만은 여전히 피아노를 배우며 한층 더 음악에 힘썼다. 결국 어머니는 아들이 음악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후 슈만은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당대의 저명한 피아노 선생 프리드리히 비크의 문하로 들어가서, 밤낮없이 피아노 연주에 몰입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무리한 탓이었는지 손가락을 다치게 된다. 더 이상 연주자로서의 꿈을 이어갈 수 없게 된 그가 절망 속에서 찾아낸 길은 연주가가 되는 대신 작곡· 지휘· 평론가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슈만의 이름을 높이는 길이 되었다.

음악가로서 슈만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은 교향곡과 같은 대곡이 아닌 피아노곡과 가곡이다. 특히 슈베르트를 존경한 그는 슈베르트를 능가하는 가곡을 세상에 발표하였다. 슈만의 피아노곡과 가곡에서는 그의 음악세계가 추구하는 서정성과 환상성이 음악과 적절히 조화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전기 낭만주의 시대는 물론이고 독일 정신을 매우 잘 표현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슈만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를 꽃피운 걸출한 작곡가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문학적 소양 또한 깊어서1834년에는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ür Müsik)》를 발행하여 많은 음악평론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슈베르트 · 쇼팽 · 브람스 등의 대음악가들을 세상무대에 소개하였다.

슈만과 클라라 부부의 초상화 <사진=이철환>

슈만과 그의 부인 클라라의 사랑은 한 편의 드라마이다. 그들의 사랑은 갖은 우여곡절을 거친 뒤 마침내 결실을 거두게 된다. 1836년 슈만은 자신의 은사인 비크의 딸이자 유명한 여류 피아니스트인 클라라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시 클라라의 나이는 18세, 슈만은 그보다 9살 위였다. 그런데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는 이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클라라 아버지 비크의 입장에서는 애지중지하는 자랑스러운 딸의 상대로 슈만이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당시 클라라의 명성은 대단했다. 그녀는 아홉 살이던 1828년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공식 연주회를 가졌고, 이후 국외 연주회만도 38회에 이르는 등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였다. 당대의 문호 괴테, 바이올린의 거장 파가니니, 작곡가 멘델스존, 피아노의 귀재 리스트 등 많은 예술가들이 클라라의 피아노 연주를 극찬했다. 또 여러 귀족들로부터 후원도 받고 있었다. 이런 딸이 피아니스트로서는 더 이상 가망이 없고 작곡가로는 무명이나 다름없는 슈만과 결혼하겠다고 하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극렬한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도 슈만과 클라라 두 사람은 자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3년여에 걸쳐 그들의 결혼을 간청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슈만과 클라라는 법에 호소하기로 하고 장인인 비크를 상대로 라이프치히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1840년 9월, 슈만과 클라라는 마침내 법정으로부터 허가를 받아내게 된다. 그해 9월 12일 클라라가 21세가 되기 전날을 기해 두 사람은 교회에서 조촐한 식을 올린 뒤 결혼생활에 들어갔다.

분명 결혼 당시에는 클라라가 좀 더 재능이 뛰어나고 장래가 촉망되던 존재였다. 그러나 이 결혼은 당대의 두 재능이 결합됨으로써 후일 음악사에 대단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슈만은 결혼을 하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해 왕성한 창작활동을 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결혼 이후 거의 모든 부문에 걸친 작곡활동을 펼쳐 나갔다.
결혼생활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1843년 슈만은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이때부터 정신착란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점차 병세가 악화되자 드레스덴에 정주하여 개인교수와 창작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후 1850년, 슈만 부부는 드레스덴을 떠나 뒤셀도르프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시립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경제적 면에서 다소 여유가 생기게 된다. 널찍한 주택이 생겨 클라라는 자신만의 독방을 가지게 되었고, 결혼 후 처음으로 거리낌 없이 마음껏 피아노 연습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객실로 쓰던 큰 방에서는 이따금 음악가들을 초대하여 하우스 콘서트를 열었다.
그렇지만 행복도 잠깐, 얼마 후 불행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슈만은 드레스덴 시절부터 이미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뒤셀도르프에 온 뒤부터는 관현악단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갈등을 겪으면서 증상이 악화되었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슈만은 정신이상현상을 보이게 된다.
1854년 2월 27일, 그는 가족들 모르게 집을 나와 라인강 다리 위에서 강에 몸을 던졌다. 요행히 뱃사람이 구해서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때 슈만은 자신이 한 짓에 대해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방에 들어가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 뒤 본 시가지 교외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서 약 2년 반 동안 요양에 힘썼다. 그러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병실에서 1856년 7월 29일,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병동은 예정되었던 철거를 면하여 지금은 슈만 박물관이 되어 있다.

슈만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왔고 나중에는 정신이상증세를 보였는데, 이러한 그의 정신병 증세는 집안내력과 무관치 않다. 출판업자였던 슈만의 아버지는 오래도록 신경쇠약을 앓다가 1826년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슈만의 손위 누이인 에밀리에도 자살했다. 슈만이 열여섯 살 되던 때의 일이었다.
슈만 또한 스물세 살이던 1833년부터 정신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슈만은 손가락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으며, 또 좋아했던 큰형 율리우스와 형수의 죽음 등 불행이 겹쳤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음악평론가로서의 삶을 계획하면서 음악잡지 〈음악신보〉의 창간을 한창 준비하고 있었다.
음악평론가 슈만은 두 개의 필명(筆名)을 사용했다. 하나는 ‘오이제비우스’ (Eusebius)였고, 또 다른 하나는 ‘플로레스탄’(Florestan)이었다. 그런데 오이제비우스는 명상적이고 우울한 인물을 뜻하며, 플로레스탄은 열정이 넘치는 사람을 뜻한다. 이 두 개의 상반된 캐릭터를 자신의 필명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슈만은 극단적인 조울증 환자였다는 것이다. 이 상반된 캐릭터는 그가 작곡한 피아노곡 《사육제 Op.9》에도 등장한다. 이는 모두 21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5곡이 ‘오이제비우스’, 제6곡이 ‘플로레스탄’이다.

거의 한평생을 정신질환에 시달렸던 슈만에게도 꿈처럼 달콤했던 시절이 있었다. 5년간의 열애 끝에 연인 클라라와 결혼했을 때였다. 이 해 한 해 동안에만 자그마치 133개의 가곡을 작곡해내었다. 사랑의 힘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슈만의 생애에서 1840년을 이른바 ‘가곡의 해’라고 부른다.
이 많은 가곡들 중에서도 《시인의 사랑(Dichterliebe)》은 백미다. 이 작품은 슈만이 1840년 여름에 완성한 가곡집으로, 독일 낭만파 시인 하이네의 시집 〈서정적 간주곡〉에 수록되어 있는 66편의 시 가운데 16편을 골라 가곡집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많은 성악가들이 이 《시인의 사랑》을 불렀지만, 그중에서도 바리톤 피셔 디스카우의 노래가 특히 유명하다.
하이네는 백만장자 은행가의 딸인 사촌 여동생 아말리에를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속물근성을 지닌 그녀로부터 냉담하게 거절당하는 비참하고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사랑을 향한 애절한 심정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슈만이 하이네의 시에서 맛보는 사랑에 대한 공감은 아주 각별했을 것이다. 슈만은 우여곡절이 많았던 클라라와의 5년에 걸친 사랑의 열정과, 그 귀중한 사랑이 결혼이라는 선물로 연결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이 작품에 매달렸다. 그리하여 음악사에 길이 남는 명작을 남기게 된 것이다.

슈만의 음악과 인생에 부인 클라라와 함께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은 다름 아닌 요하네스 브람스이다. 브람스가 슈만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1853년 9월 30일,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는 당시 거의 무명에 가까운 신인 피아니스트로서, 친구 요하임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뒤셀도르프에 있던 슈만의 집을 방문했다.
브람스가 슈만을 방문하기 이전의 일로, 한번은 브람스가 함부르크에서 연주회를 가지고 나서 슈만에게 그의 작품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슈만은 그의 작품을 개봉도 않은 채 반송했다. 브람스는 그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아 더 이상 슈만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브람스는 슈만의 작품을 면밀히 연구해 본 결과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슈만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와 그의 작품을 들어본 슈만 부부는 브람스의 음악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브람스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슈만은 〈새로운 길〉이라는 에세이에서 ‘시대의 정신에 최고의 표현을 부여한 사람’이라고 그를 격찬했다. 브람스 역시 이들 부부에 대한 깊은 존경과 친밀감이 더해 갔음은 물론이다. 이후 그들 간의 관계는 갈수록 친밀해져 갔다.

이처럼 브람스에게 있어 슈만은 음악적 스승이자 인생의 중요한 길잡이였다. 그러나 클라라라는 존재는 브람스에게 있어 연모하는 ‘여인’이었다. 브람스는 클라라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지닌 채로 다른 여인들과는 이렇다 할 로맨스 없이 한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사실 브람스는 슈만이 살아있을 동안 내내 자신이 연모하는 여인 클라라와, 은인이요 스승인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 사이에서 끝없는 고민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브람스는 심지가 굳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결국 사랑의 감정을 억제하며 우정과 존경의 마음으로 대체함으로써 세 사람의 관계를 원만히 이루어나가기로 했다. 브람스는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창작에 열정을 쏟아 나갔다. 그러던 중 브람스는 1853년 슈만이 라인강에 투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브람스는 즉시 클라라에게로 달려갔다. 브람스는 깊은 상처를 받고 힘들어하는 클라라를 최선을 다해 위로하고 도왔다.
이후 브람스는 클라라가 여생을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곁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이게 된다. 이처럼 클라라의 슬픔을 달래고 공감을 나누는 동안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한층 더 깊어갔다. 마침내 브람스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감추고는 더 이상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클라라가 자신보다 14살 연상이라는 사실도 브람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브람스는 종종 편지로 그의 끓어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클라라의 답장에는 항상 매정하게도 자신은 슈만의 아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내용만이 담겨져 있었다. 즉 남편 슈만이 사망한 이후 클라라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란 오직 남겨진 7명의 아이들 양육과 슈만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라고 답했다.

결국 브람스와 클라라 두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서로를 위로하고 도우면서 각자 예술가로서의 창작에 몰두했다. 오히려 브람스는 그 이후 한층 더 심오한 대작들을 쏟아내게 된다. 불타는 정열을 예술적 영감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클라라를 처음 만난 20살부터 64살로 타계하기까지 늘 브람스의 마음속에 있었던 존재는 클라라였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향한 연모의 열정을 모두 음악 창작에 쏟았던 것이다.
1896년 5월 20일 클라라가 77세의 나이로 타계했을 때 브람스는 “나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산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듬해 1897년 4월 3일 대작곡가 브람스는 64세를 일기로 클라라의 뒤를 따라갔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CES 2025 참관단 모집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한화 3남' 김동선 경영 검증 시험대 [서울=뉴스핌] 남라다 기자 =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삼남인 김동선 부사장이 이끄는 한화갤러리아의 백화점 업계 존재감이 흐려지고 있다. 백화점 시장 점유율도 6%대로 내려앉았으며, 수익성도 악화되면서다.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미래비전총괄이 부사장직에 오른 지 만 1년 만에 거둔 성과가 미흡하자 책임론이 부상하고 있다. 경쟁사들이 본업 경쟁력 강화를 앞세우며 간판을 교체하고 대대적인 리뉴얼을 꾀하는 사이에, 갤러리아는 유통업과 다소 동떨어진 신사업인 식품에 집중한 영향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김 부사장은 명품 강화와 백화점과 호텔 계열사 간 시너지 창출 두 가지로 본업 반등을 꾀하고 있다.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부사장. [사진=한화갤러리아] ◆김동선 부사장 취임 1년...그룹 존재감은 UP 26일 업계에 따르면 김동선 미래비전총괄이 올해 11월로 부사장직에 오른 지 만 1년이 지났다. 현재 김동선 부사장은 한화갤러리아를 비롯해 한화호텔앤드리조트, 한화로보틱스, 한화모멘텀, 한화인더스트리얼솔루션즈 미래비전총괄과 함께 ㈜한화 건설부문 해외사업본부장을 겸임하고 있다. 이로써 김 부사장은 한화그룹 내 총 6개 계열사의 미등기 임원에 이름을 올린 상황이다. 김 부사장이 지난 2020년 한화에너지 글로벌전략담당 상무보로 입사해 본격적으로 경영 수업을 시작한 지 4년여 만의 일이다. 그는 그간 그룹 내에서 입지를 다져오면서 존재감을 키워왔다. 2022년 갤러리아부문 전략부문장 전무에 선임됐으며, 이듬해 3월 한화갤러리아가 한화솔루션으로부터 독립법인으로 분사하며 그룹 내 영향력을 키웠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경영 승계 과정에서 유통·서비스부문을 김동선 부사장에게 물려주겠다는 의중이 반영된 결과다. 한화갤러리아 지분도 올해 대폭 늘렸다. 한화갤러리아는 김 부사장이 지난 8월 23일부터 9월 11일까지 20일간 진행된 공개매수를 통해 2816만4783주를 확보했다. 이로써 김 부사장의 보유 지분은 기존 2.32%에서 16.85%로 높아져 2대 주주로 올라섰다. 1대 주주는 36.31%를 보유한 ㈜한화이고, 3대 주주는 한화솔루션으로 1.39%의 지분을 갖고 있다.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갤러리아 명품관 외관 전경. [사진=한화갤러리아] ◆신사업 집중에 본업 경쟁력 약화 김 부사장 개인적으로는 그룹 안에서 존재감이 뚜렷해졌지만, 내실 경영엔 부진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본업인 백화점 사업은 오히려 퇴보하며 김 부사장의 경영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최근 1년 사이에 주력 사업인 백화점의 사업 경쟁력은 약화했다. 한화갤러리아의 시장 점유율은 2022년 7.8%에서 2023년 6.8%, 올해 3분기에는 6.4%를 기록하며 꾸준히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실적도 뒷걸음치고 있다. 한화갤러리아는 지난해에 이어 올 상반기에도 매출 역성장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한화갤러리아의 올해 3분기 연결기준 매출은 1147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4% 감소했고, 19억 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지난 2분기 영업손실 45억 원에 이어 3분기까지 2개 분기 연속으로 적자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호텔 사업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올해 1~3분기 한화호텔앤드리조트의 리조트부문 매출은 전년 대비 4%가량 줄어든 4182억 원으로 집계됐다. 영업이익은 54억 원으로 전년 동기(179억 원) 대비 3분의 1 수준에 그쳤다. 다만 김동선 부사장이 역점적으로 추진했던 파이브가이즈는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신사업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다. 파이브가이즈 운영사인 에프지코리아 등 식음료 부문 매출은 3분기 기준 370억 원으로 지난해 말(104억 원) 대비 3배 이상 뛰었다. 그러나 식음료 부문 매출 비중이 3분기 기준 전체의 9.4%대로 크지 않은 만큼 한화갤러리아 성장을 이끌기엔 역부족이다. 백화점 매출 비중은 90.6%에 달한다. 본업 경쟁력 약화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는 이유다.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 웨스트에 오픈하는 에르메스 매장 전경. [사진=한화갤러리아] ◆본업으로 다시 눈 돌리는 김동선 이에 한화갤러리아는 계열사 간 시너지 극대화로 승부수를 띄운 모습이다. 한화 유통·서비스 부문(한화갤러리아, 한화호텔앤드리조트)은 포인트 교차 사용 제도를 시행하며 계열사 간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계획이다. 이번 개편으로 백화점과 갤러리아몰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G포인트'를 한화리조트를 비롯해 호텔 사업장과 골프장, 아쿠아플라넷 등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한화호텔앤드리조트의 'H-라이브 클럽' 포인트 역시 갤러리아백화점 등 한화갤러리아의 사업장까지 사용처를 확대한다. 지난달에는 통합 유니폼을 도입하며 브랜드 통일성을 강화했다. 통합 유니폼 도입은 각사 모두 10년 넘게 사용한 유니폼을 교체하며 브랜드 통일성을 확보하고 고객 인지도 제고의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최근 발표한 '명품관 리뉴얼' 계획 역시 수익성 반등을 위한 자구책이다. 갤러리아백화점은 서울 압구정동 명품관 웨스트관을 내년 하반기까지 리뉴얼해 이스트관과 마찬가지로 럭셔리 공간을 넓힐 방침이다. 컨템포러리 브랜드 위주로 이스트(EAST)에 비해 상대적으로 명품 브랜드가 적었던 웨스트(WEST) 공간을 대폭 리뉴얼한다는 구상이다. '갤러리아=명품'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해 백화점 큰손인 VIP들을 잡아 실적 개선을 이루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한화갤러리아 관계자는 "김 부사장은 미래비전총괄로서 단순 신사업을 넘어 향후 회사를 이끌 새로운 청사진을 그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가시적 성과를 낸 파이브가이즈 등 식음료 부문은 물론, 본업인 백화점, 호텔 등을 포함해 향후 다양한 사업군에서 회사의 미래 성장 동력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nrd@newspim.com 2024-11-26 17:07
사진
모델 문가비 아들 친부는 정우성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모델 문가비(35)가 출산한 아들의 친부가 배우 정우성(51)인 것으로 드러났다. 정우성 소속사 아티스트컴퍼니는 24일 "문가비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한 아이는 정우성의 친자가 맞다"며 "아이의 양육 방식에 대해서 최선의 방향으로 논의 중이다. 아버지로서 아이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출산 시점과 두 사람의 교제 여부, 결혼 계획 등 사생활 관련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알렸다. 배우 정우성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앞서 두 사람 사이의 득남 소식이 알려졌다. 두 사람은 2022년 한 모임에서의 만남 가까이 지냈으나 교제한 사이는 아니었고 결혼 계획도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작년 6월 문가비가 임신 사실을 알렸고 정우성은 양육의 책임을 약속했다고 한다. 문가비는 뷰티 예능 프로그램 '겟잇뷰티' 등으로 얼굴을 알린 한동안 활동을 중단했다가 지난 22일 인스타그램을 통해 아들 출산 사실을 고백했다. 그러나 결혼 여부나 아이 아버지에 관한 언급은 없어 궁금증을 샀다. 당시 문가비는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소식에 아무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저는 임신의 기쁨이나 축하를 마음껏 누리기보다는 가족들의 축복 속에 조용히 임신 기간 대부분을 보냈다"며 "그렇게 하기로 선택한 건 오로지 태어날 아이를 위함이었다. 마음 한편에 늘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꽁꽁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사진=문가비 인스타그램] 이어 "세상에 나온 아이를 앞에 두고 여전히 완벽한 준비가 되지 않은 엄마지만 그런 내 부족함과는 상관없이 존재 자체만으로 나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워주는 아이를 보며, 완벽함보다는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 찬 건강한 엄마가 돼야겠다고 다짐했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문가비는 1989년생으로 2017년 온스타일 예능 '매력티비'와 '겟잇뷰티'로 얼굴을 알렸다. 이후 SBS '정글의 법칙'과 KBS '볼빨간 당신' 등 각종 예능에 출연했다. 여러 광고와 헤라서울패션위크 등 패션쇼 무대에도 섰다. jyyang@newspim.com 2024-11-25 09:48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