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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장인과의 소송 끝에 쟁취한 사랑, 로베르트 슈만 vs 클라라 슈만

기사입력 : 2017년11월10일 12:00

최종수정 : 2017년11월10일 12:00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17)

슈만의 대표작중의 하나인 《시인의 사랑》은 모두 16개의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각 곡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1곡부터 제6곡까지는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으며, 제7곡부터 제14곡까지는 실연의 아픔을, 마지막 제15곡과 16곡에서는 지나간 청춘의 향수와 실패한 사랑에 대한 쓰라린 심정을 노래한다.

제1곡 〈아름다운 5월에 (Im wunderschonen Monat Mai)〉는 짤막하고 아름다운 서주로 시작되며 매우 사랑스럽고 서정적이다
“아름다운 오월에 꽃봉오리들이 모두 피어날 때
나의 마음속에도 사랑의 꽃이 피어났네
아름다운 오월에 새들이 모두 노래할 때
나도 그 사람에게 고백했네 초조한 마음과 소원을”

그리고 제7곡 〈나는 슬퍼하지 않으리(Ich grolle nicht)〉는 《시인의 사랑》의 중추적인 곡이다. 시인이 노랫말처럼 이제 자신의 사랑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노래하고 있다. 
“나는 울지 않으리 이 가슴이 부풀어 터지더라도
영원히 잃어버린 사랑이여
나는 울지 않으리 그대가 다이아몬드의 빛으로 꾸밀지라도
그대 심중의 어둠을 비쳐줄 빛은 없으리”

낭만주의 음악가의 한사람으로 주옥같은 피아노곡들과 수많은 가곡을 남긴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 그는 1810년 6월 8일에 독일 작센지방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적 출판을 하는 한편 문필에도 종사한 문화인이었고, 어머니는 야무진 성격의 사람이었다. 슈만은 7세 때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부터 기초 교육을 받은 이후 스스로 작곡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또 부친의 책방에서 음악 서적을 읽었고, 바이런과 리히터 등 문인들 작품과 칸트의 철학을 연구하면서 교양을 쌓았다.
슈만의 어머니는 음악의 길로 나아가는 아들을 불안하게 여겼다. 16세 때 아버지가 타계하자, 어머니의 권유로 라이프치히 대학에 들어간 슈만은 법률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도 역시 피아노를 치는 데 열중했다. 놀란 모친은 그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전학시킴으로써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막아 보려 했다.
그런데도 슈만은 여전히 피아노를 배우며 한층 더 음악에 힘썼다. 결국 어머니는 아들이 음악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후 슈만은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당대의 저명한 피아노 선생 프리드리히 비크의 문하로 들어가서, 밤낮없이 피아노 연주에 몰입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무리한 탓이었는지 손가락을 다치게 된다. 더 이상 연주자로서의 꿈을 이어갈 수 없게 된 그가 절망 속에서 찾아낸 길은 연주가가 되는 대신 작곡· 지휘· 평론가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슈만의 이름을 높이는 길이 되었다.

음악가로서 슈만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은 교향곡과 같은 대곡이 아닌 피아노곡과 가곡이다. 특히 슈베르트를 존경한 그는 슈베르트를 능가하는 가곡을 세상에 발표하였다. 슈만의 피아노곡과 가곡에서는 그의 음악세계가 추구하는 서정성과 환상성이 음악과 적절히 조화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전기 낭만주의 시대는 물론이고 독일 정신을 매우 잘 표현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슈만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를 꽃피운 걸출한 작곡가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문학적 소양 또한 깊어서1834년에는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ür Müsik)》를 발행하여 많은 음악평론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슈베르트 · 쇼팽 · 브람스 등의 대음악가들을 세상무대에 소개하였다.

슈만과 클라라 부부의 초상화 <사진=이철환>

슈만과 그의 부인 클라라의 사랑은 한 편의 드라마이다. 그들의 사랑은 갖은 우여곡절을 거친 뒤 마침내 결실을 거두게 된다. 1836년 슈만은 자신의 은사인 비크의 딸이자 유명한 여류 피아니스트인 클라라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시 클라라의 나이는 18세, 슈만은 그보다 9살 위였다. 그런데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는 이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클라라 아버지 비크의 입장에서는 애지중지하는 자랑스러운 딸의 상대로 슈만이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당시 클라라의 명성은 대단했다. 그녀는 아홉 살이던 1828년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공식 연주회를 가졌고, 이후 국외 연주회만도 38회에 이르는 등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였다. 당대의 문호 괴테, 바이올린의 거장 파가니니, 작곡가 멘델스존, 피아노의 귀재 리스트 등 많은 예술가들이 클라라의 피아노 연주를 극찬했다. 또 여러 귀족들로부터 후원도 받고 있었다. 이런 딸이 피아니스트로서는 더 이상 가망이 없고 작곡가로는 무명이나 다름없는 슈만과 결혼하겠다고 하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극렬한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도 슈만과 클라라 두 사람은 자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3년여에 걸쳐 그들의 결혼을 간청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슈만과 클라라는 법에 호소하기로 하고 장인인 비크를 상대로 라이프치히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1840년 9월, 슈만과 클라라는 마침내 법정으로부터 허가를 받아내게 된다. 그해 9월 12일 클라라가 21세가 되기 전날을 기해 두 사람은 교회에서 조촐한 식을 올린 뒤 결혼생활에 들어갔다.

분명 결혼 당시에는 클라라가 좀 더 재능이 뛰어나고 장래가 촉망되던 존재였다. 그러나 이 결혼은 당대의 두 재능이 결합됨으로써 후일 음악사에 대단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슈만은 결혼을 하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해 왕성한 창작활동을 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결혼 이후 거의 모든 부문에 걸친 작곡활동을 펼쳐 나갔다.
결혼생활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1843년 슈만은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이때부터 정신착란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점차 병세가 악화되자 드레스덴에 정주하여 개인교수와 창작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후 1850년, 슈만 부부는 드레스덴을 떠나 뒤셀도르프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시립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경제적 면에서 다소 여유가 생기게 된다. 널찍한 주택이 생겨 클라라는 자신만의 독방을 가지게 되었고, 결혼 후 처음으로 거리낌 없이 마음껏 피아노 연습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객실로 쓰던 큰 방에서는 이따금 음악가들을 초대하여 하우스 콘서트를 열었다.
그렇지만 행복도 잠깐, 얼마 후 불행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슈만은 드레스덴 시절부터 이미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뒤셀도르프에 온 뒤부터는 관현악단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갈등을 겪으면서 증상이 악화되었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슈만은 정신이상현상을 보이게 된다.
1854년 2월 27일, 그는 가족들 모르게 집을 나와 라인강 다리 위에서 강에 몸을 던졌다. 요행히 뱃사람이 구해서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때 슈만은 자신이 한 짓에 대해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방에 들어가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 뒤 본 시가지 교외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서 약 2년 반 동안 요양에 힘썼다. 그러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병실에서 1856년 7월 29일,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병동은 예정되었던 철거를 면하여 지금은 슈만 박물관이 되어 있다.

슈만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왔고 나중에는 정신이상증세를 보였는데, 이러한 그의 정신병 증세는 집안내력과 무관치 않다. 출판업자였던 슈만의 아버지는 오래도록 신경쇠약을 앓다가 1826년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슈만의 손위 누이인 에밀리에도 자살했다. 슈만이 열여섯 살 되던 때의 일이었다.
슈만 또한 스물세 살이던 1833년부터 정신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슈만은 손가락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으며, 또 좋아했던 큰형 율리우스와 형수의 죽음 등 불행이 겹쳤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음악평론가로서의 삶을 계획하면서 음악잡지 〈음악신보〉의 창간을 한창 준비하고 있었다.
음악평론가 슈만은 두 개의 필명(筆名)을 사용했다. 하나는 ‘오이제비우스’ (Eusebius)였고, 또 다른 하나는 ‘플로레스탄’(Florestan)이었다. 그런데 오이제비우스는 명상적이고 우울한 인물을 뜻하며, 플로레스탄은 열정이 넘치는 사람을 뜻한다. 이 두 개의 상반된 캐릭터를 자신의 필명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슈만은 극단적인 조울증 환자였다는 것이다. 이 상반된 캐릭터는 그가 작곡한 피아노곡 《사육제 Op.9》에도 등장한다. 이는 모두 21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5곡이 ‘오이제비우스’, 제6곡이 ‘플로레스탄’이다.

거의 한평생을 정신질환에 시달렸던 슈만에게도 꿈처럼 달콤했던 시절이 있었다. 5년간의 열애 끝에 연인 클라라와 결혼했을 때였다. 이 해 한 해 동안에만 자그마치 133개의 가곡을 작곡해내었다. 사랑의 힘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슈만의 생애에서 1840년을 이른바 ‘가곡의 해’라고 부른다.
이 많은 가곡들 중에서도 《시인의 사랑(Dichterliebe)》은 백미다. 이 작품은 슈만이 1840년 여름에 완성한 가곡집으로, 독일 낭만파 시인 하이네의 시집 〈서정적 간주곡〉에 수록되어 있는 66편의 시 가운데 16편을 골라 가곡집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많은 성악가들이 이 《시인의 사랑》을 불렀지만, 그중에서도 바리톤 피셔 디스카우의 노래가 특히 유명하다.
하이네는 백만장자 은행가의 딸인 사촌 여동생 아말리에를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속물근성을 지닌 그녀로부터 냉담하게 거절당하는 비참하고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사랑을 향한 애절한 심정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슈만이 하이네의 시에서 맛보는 사랑에 대한 공감은 아주 각별했을 것이다. 슈만은 우여곡절이 많았던 클라라와의 5년에 걸친 사랑의 열정과, 그 귀중한 사랑이 결혼이라는 선물로 연결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이 작품에 매달렸다. 그리하여 음악사에 길이 남는 명작을 남기게 된 것이다.

슈만의 음악과 인생에 부인 클라라와 함께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은 다름 아닌 요하네스 브람스이다. 브람스가 슈만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1853년 9월 30일,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는 당시 거의 무명에 가까운 신인 피아니스트로서, 친구 요하임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뒤셀도르프에 있던 슈만의 집을 방문했다.
브람스가 슈만을 방문하기 이전의 일로, 한번은 브람스가 함부르크에서 연주회를 가지고 나서 슈만에게 그의 작품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슈만은 그의 작품을 개봉도 않은 채 반송했다. 브람스는 그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아 더 이상 슈만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브람스는 슈만의 작품을 면밀히 연구해 본 결과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슈만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와 그의 작품을 들어본 슈만 부부는 브람스의 음악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브람스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슈만은 〈새로운 길〉이라는 에세이에서 ‘시대의 정신에 최고의 표현을 부여한 사람’이라고 그를 격찬했다. 브람스 역시 이들 부부에 대한 깊은 존경과 친밀감이 더해 갔음은 물론이다. 이후 그들 간의 관계는 갈수록 친밀해져 갔다.

이처럼 브람스에게 있어 슈만은 음악적 스승이자 인생의 중요한 길잡이였다. 그러나 클라라라는 존재는 브람스에게 있어 연모하는 ‘여인’이었다. 브람스는 클라라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지닌 채로 다른 여인들과는 이렇다 할 로맨스 없이 한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사실 브람스는 슈만이 살아있을 동안 내내 자신이 연모하는 여인 클라라와, 은인이요 스승인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 사이에서 끝없는 고민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브람스는 심지가 굳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결국 사랑의 감정을 억제하며 우정과 존경의 마음으로 대체함으로써 세 사람의 관계를 원만히 이루어나가기로 했다. 브람스는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창작에 열정을 쏟아 나갔다. 그러던 중 브람스는 1853년 슈만이 라인강에 투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브람스는 즉시 클라라에게로 달려갔다. 브람스는 깊은 상처를 받고 힘들어하는 클라라를 최선을 다해 위로하고 도왔다.
이후 브람스는 클라라가 여생을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곁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이게 된다. 이처럼 클라라의 슬픔을 달래고 공감을 나누는 동안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한층 더 깊어갔다. 마침내 브람스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감추고는 더 이상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클라라가 자신보다 14살 연상이라는 사실도 브람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브람스는 종종 편지로 그의 끓어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클라라의 답장에는 항상 매정하게도 자신은 슈만의 아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내용만이 담겨져 있었다. 즉 남편 슈만이 사망한 이후 클라라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란 오직 남겨진 7명의 아이들 양육과 슈만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라고 답했다.

결국 브람스와 클라라 두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서로를 위로하고 도우면서 각자 예술가로서의 창작에 몰두했다. 오히려 브람스는 그 이후 한층 더 심오한 대작들을 쏟아내게 된다. 불타는 정열을 예술적 영감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클라라를 처음 만난 20살부터 64살로 타계하기까지 늘 브람스의 마음속에 있었던 존재는 클라라였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향한 연모의 열정을 모두 음악 창작에 쏟았던 것이다.
1896년 5월 20일 클라라가 77세의 나이로 타계했을 때 브람스는 “나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산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듬해 1897년 4월 3일 대작곡가 브람스는 64세를 일기로 클라라의 뒤를 따라갔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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